옥스퍼드대학교 올드 로드 캠퍼스 혁신 건물 3층에 위치한 노보 노디스크의 옥스퍼스 연구센터. [사진=노보 노디스크 제공][헬스코리아뉴스 / 임해리] 비만치료제 '위고비(Wegovy, 세마글루타이드·semaglutide)'의 성공으로 천문학적인 매출을 올리고 있는 노보 노디스크(Novo Nordisk)에서 지난 1년 동안 직원 1만 3000명이 빠져나간 것으로 나타났다.
회사가 지난해 공식적으로 발표했던 구조조정 대상은 약 9000명이었다. 여기에 약 4000명이 추가로 회사를 떠나면서 실제 인력 감소 규모가 당초 계획보다 훨씬 커진 것이다.
다만 1만 3000명이 모두 정리해고된 것은 아니다. 노보 노디스크는 지난해 약 9000개 직무를 줄이는 구조조정을 단행했고, 이후 추가로 떠난 약 4000명은 자연퇴사와 공석 미충원 등으로 감소한 인력이다.
노보 노디스크의 마지아르 마이크 두스트다르(Maziar Mike Doustdar) 최고경영자(CEO)는 21일 영국 런던에서 열린 '캐피털 마켓 데이(Capital Markets Day)'에서 이 같은 인력 감소 규모를 공개했다.
노보의 인력감원은 실적이 악화돼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제약회사의 구조조정과는 성격이 다르다. 이 회사는 여전히 막대한 매출과 이익을 내고 있다. 그럼에도 인력감축에 나선 것은 다름아니다. 일라이 릴리(Eli Lilly)와의 경쟁이 심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갈수록 커지는 약가 압박과 세마글루타이드 특허만료 이후까지 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돈 잘 벌어도 인력감축은 필수?
노보 노디스크의 2025년 전체 매출은 3091억 덴마크크로네(약 474억 달러)였다. 전년보다 6% 증가한 수치다. 영업이익도 1277억 크로네(약 196억 달러)에 달했다.
비만치료제 사업은 더 빠르게 성장했다. 지난해 비만치료제 매출은 823억 4700만 크로네(약 126억 달러)로 전년보다 26%나 성장했다. 위고비가 포함된 비만치료제 사업만으로 웬만한 글로벌 제약사의 전체 매출에 버금가는 돈을 벌어들인 셈이다.
그런 회사가 1만 명이 넘는 인력을 줄였다.
배경에는 역설적으로 위고비의 성공이 있다. 비만치료제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면서 노보 노디스크는 생산·영업·연구개발 조직을 빠르게 키웠다. 2024년에는 약 1만 3000명의 인력을 추가하며 조직 규모를 크게 늘렸다.
그 과정에서 조직이 복잡해지고 비용도 급증했다. 노보 노디스크 역시 지난해 9월 구조조정을 발표하면서 최근 몇 년간의 급격한 사업 확장이 조직의 복잡성과 비용 증가로 이어졌다고 설명했다.
회사는 당시 "전 세계 약 7만 8400개 직무 가운데 약 9000개를 줄이고 의사결정 단계를 단순화하겠다"고 밝혔다. 이를 통해 2026년 말부터 연간 약 80억 크로네의 비용을 절감하고, 절감한 자원을 비만·당뇨병 사업과 연구개발에 다시 투입한다는 계획이었다.
이번에 공개된 1만 3000명이라는 숫자는 실제 조직 축소 규모가 당초 계획보다 더 컸다는 것을 보여준다.
노보 노디스크 덴마크 본사 전경 [사진=News Øresund·Johan Wessman, CC BY 3.0, via Wikimedia Commons]노보의 '독주 시대' 끝낸 릴리…커지는 경쟁 압박
조직 슬림화의 또 다른 배경은 비만치료제 시장의 경쟁구도 변화다.
위고비가 출시된 초기만 해도 노보 노디스크는 글로벌 비만치료제 시장을 사실상 쥐락펴락했다. 하지만 일라이 릴리가 터제파타이드(tirzepatide) 기반 비만치료제 '젭바운드(Zepbound)'를 내놓으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젭바운드는 올해 2분기에만 49억 2800만 달러의 매출을 올렸다. 전년 동기보다 46% 증가한 규모다. 상반기 누적 매출은 90억 8800만 달러로 60% 늘었다. 젭바운드 한 품목으로 불과 반년 만에 경쟁사인 노보의 전체 비만치료제 매출(약 126억 달러)의 72% 수준까지 올린 것이다.
릴리는 후속 비만치료제 개발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경구용 GLP-1 치료제 '오포글리프론(orforglipron)'과 GLP-1·GIP·글루카곤 수용체를 동시에 겨냥하는 삼중작용제 '레타트루타이드(retatrutide)' 등이 뒤를 잇고 있다.
노보 노디스크도 위고비 경구용 제제와 차세대 후보물질 '카그리세마(CagriSema)', '제나감타이드(zenagamtide·아미크레틴)' 등을 개발하고 있지만 비만치료제 시장의 경쟁 강도는 과거와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높아졌다.
가격 경쟁도 부담이다. 비만치료제 수요 자체는 계속 늘고 있지만 미국을 중심으로 현금결제 가격 인하와 보험·정부의 약가 압박이 커지고 있다. 많이 팔더라도 과거와 같은 가격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을지 불확실성이 커진 것이다.
세마글루타이드 이후가 더 큰 문제
장기적으로 노보 노디스크가 해결해야 할 가장 큰 과제는 세마글루타이드 이후의 성장동력이다.
세마글루타이드는 비만치료제 위고비와 당뇨병 치료제 '오젬픽(Ozempic)'의 핵심 성분으로, 현재 노보 노디스크의 실적을 떠받치는 핵심 자산이다.
그러나 일부 국가에서는 이미 특허 보호 종료가 시작됐고, 미국과 유럽에서도 2030년대 초부터 독점권 상실이 본격화할 전망이다. 세마글루타이드 매출 의존도가 높은 노보 노디스크로서는 지금 벌어들이는 현금을 이용해 다음 성장동력을 만들어야 한다.
두스트다르 CEO는 이번 캐피털 마켓 데이에서 "2030년까지 연간 수십억 달러의 매출을 올릴 수 있는 이른바 '멀티 블록버스터' 신약을 5개 이상 출시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신규 파이프라인에서 2035년 1500억 크로네(약 230억 달러) 이상의 매출을 창출하겠다는 계획도 공개했다. [아래 관련기사 참조]
사업 영역도 비만과 당뇨병을 넘어 간질환, 심혈관질환, 혈액·내분비질환 등으로 넓힐 방침이다. 두스트다르 CEO는 "인력 감축으로 절감한 비용 역시 연구개발에 다시 투입하고 있다"고 밝혔다.
비만치료제로 역사적인 성장세를 누렸던 노보 노디스크가 이제는 그 성공으로 커진 몸집을 줄이면서 '위고비 다음'을 준비하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