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외 제약바이오 기업들이 신약 후보물질을 사들이면서 가능성을 검증한 뒤 가능성이 확인된 자산에만 단계적으로 자금을 투입하는 '옵션형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해 AI로 제작한 이미지)[헬스코리아뉴스 / 서정필] 국내외 제약바이오 기업들이 신약 후보물질을 사들이는 방식을 바꾸고 있다. 과거처럼 회사를 통째로 인수하거나 특정 후보물질에 대한 개발·상업화 권리(라이선스)를 한 번에 넘겨받는 대신, 먼저 검증한 뒤 가능성이 확인된 자산에만 단계적으로 자금을 투입하는 '옵션형 라이선스' 계약이 확산되고 있다. 우수한 후보물질을 확보하는 일만큼이나 실패했을 때의 손실을 관리하는 것이 그만큼 중요해졌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LG화학이 선택한 새로운 전략
LG화학은 지난 8일 중국 OTR 테라퓨틱스(OTR Therapeutics)와 항암 후보물질 발굴·개발을 위한 전략적 협업 계약을 체결했다. OTR의 개발 물질 하나를 자산으로 만드는 개념이 아니다. OTR이 중국 현지에서 유망 자산을 발굴해 초기 기술평가를 수행하면, 양사가 공동으로 검증한 뒤 개별 프로그램별로 라이선스 계약을 추진하는 구조다. 계약금(반환 의무가 없는 선지급금)과 마일스톤(단계별 성공 지표에 따른 기술료)은 그 라이선스가 체결되는 시점에서야 비로소 발생한다. 총 계약 규모는 공개되지 않았다. [아래 관련기사 참조]
LG화학이 이렇게 중국 기업과 손을 잡는 이유는 최근 중국의 항암 자산이 양과 질 모든 측면에서 만족도를 높이며 글로벌 시장에서 매력적인 공급처로 부상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중국은 과거의 기술 모방 단계에서 벗어나 글로벌 빅파마들이 수조 원대의 계약 경쟁에 앞다쿼 나설 만큼 혁신적인 신약 후보물질을 쏟아내고 있다. 위험을 낮추는 '옵션형 거래'의 확산은, 이처럼 놓칠 수 없는 중국 시장의 유망 자산을 선점하되 실패의 대가는 최소화하려는 글로벌 기업들의 고도의 계산이 깔린 결과다.
과거 실패가 가져온 학습효과
이 방식은 LG화학이 3년여 전 택한 방법과 대조된다는 점에서도 눈길을 끈다. LG화학은 2022년 10월 미국 항암 기업 아베오 파마슈티컬스(AVEO Pharmaceuticals) 지분 100%를 인수하기로 결정했다. 실제 집행은 이듬해 1월 이뤄졌다. 미국 보스턴 소재 생명과학 자회사인 LG화학 글로벌 이노베이션센터(LG Chem Life Science Innovation Center, LG CBL)에 5억 7100만 달러(7072억 원)를 출자해 인수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3년이 지난 지금, 당시의 인수가 기대만큼의 성과를 냈다고 판단하기는 어렵다. 기대를 모았던 병용 임상 3상 TiNivo-2는 2024년 7월 1차 평가지표인 무진행생존기간(PFS) 개선에 실패했다. 병용군의 PFS 중앙값은 5.7개월로, (대조약물로 사용된) 포티브다 단독군(7.4개월)에 오히려 못 미쳤다. 적응증을 넓히려던 전략에 제동이 걸렸다.
이번 OTR과의 계약 조건은 아베오 인수의 학습효과가 영향을 줬다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는다. 아베오 인수는 자산의 가치가 확정되기 전에 대금 전액을 먼저 치르는 구조였다. 임상 결과가 어긋나도 회수할 방법이 없다.
글로벌 시장의 실리적 접근법
이러한 흐름은 국내 다른 바이오기업에서도 발견된다. 셀트리온은 지난해 11월 국내 바이오텍 트리오어(TriOar)로부터 항체약물접합체(ADC) 플랫폼 'TROCAD'를 도입하면서 선급금을 아예 없앴다. 트리오어 측이 첫 번째 타깃의 기술검증(PoC)에 성공해야 플랫폼 기술 실시료 10억 원이 나가는 구조다. 'TROCAD'는 항체에 붙여 쓰는 기술이다. 암 조직에서만 약물이 활성화되도록 설계됐다. 셀트리온은 이 기술을 최대 6개 타깃에 적용할 권리를 확보했다. 6개를 모두 행사하면 개발·판매 마일스톤으로 최대 3억 5600만 달러(약 5220억 원)가 붙는다. 로열티는 별도다.
일본 다케다약품공업(Takeda Pharmaceutical Company)은 지난 2024년 6월 중국 아센티지파마(Ascentage Pharma)의 만성골수성백혈병 치료제 '올베렘바티닙(olverembatinib)'에 대해 1억 달러(한화 약 1500억 원)만 지급하고 독점 라이선스 옵션 계약을 맺었다. 행사료와 마일스톤을 합쳐 최대 12억 달러(한화 약 1조 8000억 원)가 걸려 있지만, 2년이 지난 현재까지 옵션을 행사하지 않고 있다. 2025년 10월 (중국) 이노벤트 바이오로직스(Innovent Biologics)와의 협력에서도 임상 신호가 확실한 자산은 즉시 들여오되, 임상 1상 단계 물질은 옵션으로 묶었다.
글로벌 빅파마도 다르지 않다. 브리스톨마이어스스퀴브(BMS)는 지난 5월 12일 중국 헝루이파마(Jiangsu Hengrui Pharmaceuticals)와 초기 단계 프로그램 13개를 대상으로 최대 152억 달러(한화 약 22조 9000억 원) 규모의 협업 계약을 맺었다. 총액은 천문학적이지만 선급금은 6억 달러(한화 약 9000억 원)에 그쳤다.
2주 뒤인 5월 28일 화이자도 이노벤트의 초기 항암 프로그램 12개를 놓고 최대 105억 달러(한화 약 15조 8000억 원)를 걸었다. 선급금은 6억 5000만 달러(한화 약 9800억 원)다. 나머지 98억 5000만 달러(한화 약 14조 8400억 원)는 개발·규제·상업화 마일스톤으로, 성과가 나와야 지급된다. 이 계약은 이노벤트가 임상 1상까지 개발을 책임지고, 이후 글로벌 개발은 화이자가 넘겨받는다. LG화학과 OTR 사이 계약과 상당히 흡사한 구조다.
업계는 신약 개발의 불확실성이 커질수록 '선검증 후투자' 방식의 옵션 계약이 더욱 늘어날 것으로 보고 있다. 단순히 유망 자산을 선점하는 것 못지않게, 철저한 사전 검증을 통해 실패 확률을 얼마나 정교하게 통제하느냐가 기업의 성패를 가르는 또 하나의 경쟁력이 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