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바이오 기업들이 그동안 약물 개발의 벽으로 여겨졌던 표적 공략에 잇따라 뛰어들고 있다. 연구개발 영역을 이른바 '언드러거블(undruggable·약물화가 어려운 표적)'까지 넓히고 있는 것이다. (사진은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해 AI 이용해 제작한 이미지)[헬스코리아뉴스 / 서정필] 국내 바이오 기업들이 그동안 약물 개발의 벽으로 여겨졌던 표적 공략에 잇따라 뛰어들고 있다. 연구개발 영역을 이른바 '언드러거블(undruggable·약물화가 어려운 표적)'까지 넓히고 있는 것이다. 후보물질 상당수가 최근 1~2년 사이 임상 1상 안팎에 진입한 만큼, 올해 하반기부터 초기 데이터가 순차적으로 나올 전망이다.
대표적인 표적은 KRAS, p53, STAT3 등 암 발생과 진행에 깊이 관여하는 단백질이다. 이들 표적은 ▲약물이 안정적으로 결합할 공간이 부족하거나 ▲단백질 구조가 복잡하거나 ▲전사 조절과 단백질 간 상호작용에 관여한다. 이런 이유로 오랫동안 신약 개발이 어려운 표적으로 분류돼 왔다.
202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이 분류는 서서히 경계가 옅어지고 있다. 저분자 저해제뿐 아니라 변이 단백질 재활성화제, 표적단백질분해제(TPD, Targeted Protein Degradation), 분자접착제, 항체-분해약물접합체(DAC, Degrader-Antibody Conjugate) 등 새로운 접근법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흐름에 발맞춰 국내 기업들도 기존 표적항암제를 넘어 새로운 표적 영역으로 연구개발 범위를 넓히고 있다.
p53 변이 공략, 망가진 암 억제 스위치 활성화
p53 변이 분야에서 현재 임상 단계에 진입한 기업은 LG화학과 핀테라퓨틱스 등 2곳이다.
LG화학은 지난달 30일 미국 식품의약국(FDA)으로부터 항암신약 후보물질 'LG00313112'의 임상 1/2상 시험계획(IND)을 승인받았다고 밝혔다. 'LG00313112'는 지난 4월 LG화학이 미국 프론티어 메디신즈(Frontier Medicines)와의 계약을 통해 도입한 신약물질이다. 중화권을 제외한 글로벌 독점 개발 및 상업화 라이선스 도입 계약이다.
회사 측에 따르면 'LG00313112'는 전체 암 환자의 1~3%에서 확인되는 'TP53 Y220C' 변이를 공략하며, 해당 변이에 의해 구조적으로 불안정해진 p53 단백질을 안정화해 본래의 종양 억제 기능을 회복시키는 기전의 약물이다. 동일 계열 최초의 공유결합 기반 약물 설계를 적용해 표적에 대한 안정적인 결합력과 지속적인 약효를 내는 것이 특징이다.
실제 전임상 결과 낮은 용량으로도 우월한 항암 효능, 약물 반응 지속성이 관찰됐으며, 여러 종양에서 발현되는 KRAS 변이를 동시 동반한 종양모델에서도 항암 활성 유지가 확인됐다는 것이 회사 측의 설명이다.
p53 변이는 한 가지가 아니다. 인간 암에서 가장 흔하게 변이되는 유전자답게 종류만 수백 가지에 이른다. R175H, R273H처럼 자주 나타나는 변이도 여럿이다. 그럼에도 대부분은 약물이 파고들 틈을 남기지 않아 표적화가 어려웠다. Y220C는 예외다. 변이 자리에 작은 틈이 생겨, 약물이 끼어들어 구조를 붙잡을 수 있다. 수많은 p53 변이 가운데 Y220C가 가장 먼저 표적이 된 이유다.
미국 국립암연구소(NCI)가 구축한 암 유전체 지도(TCGA) 데이터에 따르면 'TP53' 유전자 변이 암환자들의 치료 후 평균 생존기간은 29개월로, 해당 변이가 없는 암환자들(63개월)에 비해 절반 이상 짧다. 현재까지 해당 변이 관련 상용화 약물은 없는 상황이다.
LG화학은 글로벌 개발 가속화를 위해 1상과 2상을 하나의 프로토콜로 통합해 초기 임상 단계에서 투약 용량과 유효성을 조기에 확인한다는 전략이다. 임상 1상에서는 난소암, 폐암, 유방암 등 'TP53 Y220C' 변이를 보유한 진행성 고형암 환자를 대상으로 안전성, 내약성, 2상 권장 용량 및 예비 유효성 등을 평가하고 이후 2상에서 유효성을 본격적으로 검증할 예정이다.
글로벌 시장에서의 대표적인 경쟁 약물은 미국 PMV파마(PMV Pharma)의 '레자타포트(rezatapopt, 개발코드명 : PC14586)'로, 내년 1분기 신약허가신청(NDA) 제출을 목표로 속도를 내고 있다.
같은 p53을 노리되, 직접 결합 방식이 아닌 다른 우회 경로로 접근하는 국내 약물도 주목받고 있다. 핀테라퓨틱스는 변이 단백질에 직접 붙는 대신, 그 조절 인자인 CK1α를 분해해 p53 경로를 간접적으로 활성화하는 전략을 택했다. 개발 중인 'PIN-5018'은 CK1α를 선택적으로 분해하는 경구용 분자접착제(MGD)이다. LG화학이 변이 p53에 직접 결합해 구조를 안정화한다면, 핀테라퓨틱스는 상류 조절 인자를 제거해 억제되어 있던 p53 단백질의 본래 기능을 되살리는 약물 개발에 도전하고 있는 셈이다.
핀테라퓨틱스는 2025년 5월 FDA, 8월 식품의약품안전처로부터 임상 1상을 잇따라 승인받았다. 이어 11월 선양낭성암종(ACC) 환자를 대상으로 첫 환자 투여를 시작했다. MSS형 대장암 등 면역항암제가 잘 듣지 않는 유형의 암종에 대한 임상도 병형하고 있다. 'PIN-5018'은 고형암 임상에 진입한 세계 최초의 CK1α 분해제라는 게 회사의 설명이다.
포켓 없는 KRAS G12D, 직접 저해로 공략
SK바이오팜은 경구용 KRAS G12D 저해제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회사는 최근 미국 시카고에서 열린 미국암연구학회 2025 연례 학술대회(AACR 2025)에서 독자적인 화합물 구조 기반으로 개발한 경구용 KRAS G12D 저해제의 최신 연구 성과를 포스터로 발표하며 학계의 이목을 끌었다.
KRAS는 세포 성장 신호를 켜고 끄는 스위치 역할을 하는 단백질로, 변이가 생기면 스위치가 켜진 채 고정돼 암세포가 끊임없이 증식하게 된다. 그중 G12D 변이는 췌장선암(86%), 대장암(41%), 비소세포폐암(32%) 등 여러 고형암에서 가장 흔하게 나타나지만 단백질 표면이 매끄러워 약물이 결합할 만한 공간(포켓)이 없다. 먼저 치료제가 개발된 G12C 변이보다 약 2.5배 더 높은 빈도로 발견됨에도 불구하고 아직 승인된 표적치료제가 없어 개발 난도가 훨씬 높은 미충족 영역으로 꼽힌다.
SK바이오팜이 공개한 전임상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이 저해제는 KRAS G12D 변이 암세포주의 증식을 강력히 억제하는 반면 다른 돌연변이에 대해서는 50~1000배 낮은 억제 효과를 보여 높은 선택성을 입증했다. 특히 췌장암 동물 모델에 경구 투여했을 때 강력한 항종양 효과와 함께 우수한 혈장 노출 수준 및 흡수율을 나타냈다. 유의미한 부작용은 관찰되지 않았다.
회사는 이를 바탕으로 낮은 농도에서도 종양 내 pERK를 효과적으로 저해하는 '베스트 인 클래스(Best-in-Class)' 신약 후보물질 확보를 위해 선도 물질 최적화에 집중하고 있다. 이 영역의 대표적인 글로벌 경쟁 약물은 FDA 혁신치료제로 지정된 레볼루션 메디신(Revolution Medicines)의 '졸돈라시브(zoldonrasib, 개발코드명 : RMC-9805)'가 꼽힌다.
(사진=AI 제미나이 생성)KRAS 신호 전달 길목 끊는 기전도
한미약품은 KRAS 단백질을 직접 겨냥하는 대신 신호가 흐르는 길목을 차단하는 우회 전략을 펼치고 있다. 자체 개발 중인 'HM101207'은 SOS1 단백질과 KRAS의 상호작용을 억제하는 차세대 표적항암 혁신신약 후보물질이다. SOS1은 비활성 상태의 KRAS를 활성 상태로 전환하는 일종의 '점화 장치' 역할을 한다. 즉, 돌연변이 종류와 상관없이 SOS1 저해를 통해 KRAS로 이어지는 신호 전달 체계의 연쇄 반응을 원천 차단하겠다는 구상이다.
회사는 최근 RAS 표적 신약개발 서밋 등 글로벌 학회에서 'HM101207'이 다른 경쟁 약물 대비 우수한 표적 특이성을 지녔으며, 약물상호작용(DDI) 프로파일을 최소화해 강력한 항암 시너지를 낸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특히 'HM101207'은 승인된 KRAS G12C 저해제(아다그라십 등)나 MEK 저해제, RTK 저해제 등과 병용 투여 시 다양한 KRAS 변이 고형암 모델에서 기존 치료제의 내성 유발을 극복하고 뛰어난 항암 활성을 나타냈다. 한미약품은 전임상 독성 시험 성과를 바탕으로 내년 7월 국내외 임상시험계획(IND)을 신청할 계획이다.
카나프테라퓨틱스 역시 KRAS의 상·하류 신호 경로를 동시에 막아서는 'SOS1·SHP2 이중 차단' 전략을 가동하고 있다. 암세포 성장 신호는 세포막에서 시작해 아래로 흘러가는데, 이 길목에서 상대적으로 위쪽에 위치한 상류 신호를 중계하는 핵심 단백질이 SHP2이며, 그 신호를 받아 KRAS에 직접 전달하는 아래쪽 하류 신호 단계가 SOS1이다.
카나프테라퓨틱스는 이 두 지점을 모두 공략한다. 하류 신호 경로의 SOS1을 저해하는 'KNP-504'는 지난 2024년 유한양행에 총 2080억 원 규모로 기술이전되어 올해 임상 진입을 준비 중이다. 상류 신호 단계에서 작용하는 SHP2 저해제 'KNP-503'은 전임상 단계에서 기술이전을 타진하고 있다.
글로벌 빅파마들 역시 이 같은 우회 경로 차단 전략에 주목하고 있다. SOS1 저해제 분야에서는 바이엘이 'BAY 3498264'의 임상 1상을 진행 중이며, 암젠의 KRAS G12C 저해제 소토라십(sotorasib)과 병용해 내성 극복 가능성을 평가하고 있다. 이 분야 글로벌 선두 주자인 베링거인겔하임 또한 일찍이 'BI-1701963'을 내세워 다양한 표적항암제와의 병용 임상 1상을 주도해 왔다.
카나프테라퓨틱스의 이중 차단 전략과 달리 글로벌 경쟁사들은 SHP2 단일 표적에 집중하는 모양새다. 노바티스의 'TNO155'와 레볼루션 메디슨의 'RMC-4630'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현재 임상 1/2상 단계에서 자사의 주력 파이프라인과 조합하는 'SHP2 단일 저해제' 형태의 개발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이 같은 병용 중심 개발이 추진되는 이유는 단독 투여 시 암세포가 다른 우회 경로를 찾아내며 빠르게 내성을 유발할 수 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결합 공간 없는 전사인자 STAT3 직접 억제 시도
유전자 발현을 조절하지만 약물이 붙을 자리가 없어 대표적인 약물 불가능(Undruggable) 영역으로 꼽혀온 전사인자를 정조준한 기업도 있다. JW중외제약이 개발 중인 'JW2286'은 전사인자 STAT3을 선택적으로 저해하는 고형암 치료제 후보물질이다.
STAT3은 세포 내에서 유전자 발현을 촉진하는 하위 단백질로, 비정상적으로 활성화될 경우 암세포의 성장과 증식, 전이뿐만 아니라 기존 항암제에 대한 약제 내성을 유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글로벌 제약업계는 주로 상류 단백질인 JAK 저해제를 개발해왔으나, 이는 다른 정상적인 STAT 단백질까지 억제해 부작용을 낳았다.
JW중외제약은 자체 구축한 AI 및 데이터 과학 플랫폼 주얼리(JWELRY)와 클로버(CLOVER)를 활용해 STAT3만 정밀 타깃하는 계열 내 최초(First-in-Class) 혁신 신약 개발에 성공했다.
'JW2286'은 2022년 8월 국가신약개발사업 지원 과제로 선정돼 비임상 시험에 착수했으며, 2024년 6월 GLP 독성평가 등 비임상 단계를 완수하고 식품의약품안전처로부터 임상 1상 시험계획(IND)을 승인받았다. 비임상 단계 약리시험 결과 'JW2286'은 STAT3 고활성을 바이오마커로 갖는 삼중음성 유방암, 위암, 직결장암 등 다양한 고형암에서 표준요법 대비 우수한 유효성과 안전성을 입증했다.
특히 호르몬 및 HER2 수용체가 없어 치료 옵션이 극히 제한적인 삼중음성 유방암에서 강력한 효능을 확인했다. 현재 글로벌 시장에서는 미국 트바르디 테라퓨틱스(Tvardi Therapeutics)의 'TTI-101'과 'TTI-109'가 간세포암 등에서 임상을 진행하며 비교군으로 거론되고 있다.
검증된 표적 너머로…넓어지는 K-바이오 항암 지도
이처럼 언드러거블의 벽을 깨려는 국내 기업들의 도전은 그 표적과 접근법이 한층 다양하고 정교해졌다. 변이 단백질 재활성화제(LG화학), 분자접착제(핀테라퓨틱스), 직접 저해제(SK바이오팜), 신호 차단제(한미약품·카나프테라퓨틱스)가 저마다의 독창적인 메커니즘으로 그동안 철옹성 같았던 표적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이제 시장의 눈길은 임상시험을 통해 증명될 초기 데이터로 쏠린다. 우수한 선택성과 안전성을 입증하고, 효과가 나타날 환자군을 정밀하게 걸러내는 바이오마커 전략이 뒷받침된다면 글로벌 시장에서 K-바이오의 존재감은 더욱 뚜렷해질 전망이다. 분명한 것은 국내 제약·바이오 산업의 항암제 개발 축이 이미 검증된 표적을 넘어 미개척 영역으로 빠르게 확장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언드러거블이라는 거대한 벽이 국내 기업들에게 충분히 넘어설 수 있는 가시권의 목표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