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WIN-VT 임상시험을 이끈 나탈리아 트라야노바(Natalia Trayanova) 교수(왼쪽)와 공동 제1저자인 아디티오 프라코사(Adityo Prakosa) 연구원. 트라야노바 교수는 디지털 트윈을 통해 심장 손상을 최소화하면서 치료 성공률을 극대화하는 '최적의 시나리오' 도출이 가능해졌다고 강조했다. (사진=존스홉킨스 대학교)[헬스코리아뉴스 / 서정필] 수술 전 가상 심장에서 표적을 찾고, 절개 전 가상 무릎에서 수술 옵션을 고르고, 방사선을 쏘기 전 가상 종양에서 용량을 맞춰본다. 모두 '디지털 트윈(Digital Twin)' 기술이 의료 현장에 적용된 사례다. 이러한 흐름이 최근 들어 확산되고 있다.
'디지털 트윈'이란 현실의 물리적 대상을 가상 공간에 복제하고 실제 데이터를 반영해 다양한 시나리오를 시뮬레이션하는 기술로, 항공·제조 분야에서 먼저 자리를 잡은 뒤 2010년대 후반부터 의료로 진입하기 시작했는데, 최근 적용 영역이 더욱 늘어나고 있다. 심장 부정맥 시술을 필두로, 무릎·고관절 등 정형외과 수술, 뇌종양 방사선 치료까지 "가상에서 먼저 검증하고 실제에 적용한다"는 방식이 여러 분야에서 실제 효과를 내고 있다.
표적을 알고 시술실 진입 … 심장 부정맥 시술 성공률 극대화
지난 4월 초 발행된 뉴잉글랜드의학저널(New England Journal of Medicine·NEJM) 394권 13호에 주목할 만한 연구 결과가 실렸다. 미국 존스홉킨스대학교(Johns Hopkins University) 연구팀이 수행한 TWIN-VT 임상시험으로, 미국 식품의약국(FDA) 임상시험용 의료기기 면제(IDE·Investigational Device Exemption) 승인을 받아 진행된 전향적 연구다.
연구 결과 환자 맞춤형 심장 디지털 트윈을 활용한 도자절제술(Catheter Ablation)에서 시술 직후 부정맥 유도 차단율 100%, 평균 13개월 추적 관찰 시점에서 8명이 무재발을 유지했다. 10명 중 8명은 항부정맥 약물을 완전히 끊었고 2명은 용량을 줄였다. 기존 심실빈맥(VT·Ventricular Tachycardia) 절제술의 장기 성공률이 60% 수준인 점을 감안하면 의미 있는 개선 신호다.
방법은 이렇다. 환자 MRI로 가상 심장을 재구성한 뒤 전기 자극을 가해 부정맥 발생 가능 회로를 모두 사전에 도출하는 방식이다. 의사는 표적을 미리 확보하고 시술에 들어간다. 특히 인공지능(AI) 모델 '다이몬(DIMON)'이 시뮬레이션 계산 시간을 수 시간에서 수 초로 단축하면서 실제 진료 흐름에 투입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춰졌다. 환자 몸 안에서 표적을 찾던 단계가 시술 전 가상 공간으로 옮겨진 것이다. 다만 환자 10명의 소규모 초기 임상이라는 한계는 있다.
나탈리아 트라야노바(Natalia Trayanova) 교수는 "디지털 트윈에서 실제 환자를 치료하기 전에 다양한 치료 시나리오를 먼저 시험해볼 수 있고, 심장 손상을 최소화하면서 치료 성공 가능성을 높이는 최적의 시나리오를 도출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논문 제1저자인 조너선 크리스핀(Jonathan Chrispin) 박사는 "환자에게 디지털 트윈은 삶을 바꾸고 생명을 구할 수 있는 기술"이라고 밝혔다.
정형외과 수술의 진화 … 가상 무릎에서 최적 옵션 도출
정형외과 분야에도 같은 흐름이 이어지고 있다. 세계 굴지의 정형외과 분야 실력을 자랑하는 미국 뉴욕 특수수술병원(HSS·Hospital for Special Surgery)은 지난해 'HSS 디지털 트윈 플랫폼' 개발에 착수했다. 3차원(3D) 이미징으로 환자 해부학 구조의 가상 복제본을 만든 뒤 수술 계획·수술중 의사결정·예후 예측에 실시간으로 활용하는 4년 프로젝트다. MRI 3D 데이터를 물리 기반 계산 모델과 통합해 가상 인대를 무릎에 부착하고, 실제 환경에서의 움직임을 사전에 시뮬레이션한다. 인대를 조이거나 늘리는 조정도 가능해 부상 패턴별 수술 옵션을 미리 검토할 수 있다.
첫 임상 적용은 전방십자인대(ACL·Anterior Cruciate Ligament) 재건술이었다. HSS는 4년 내 무릎 관련 임상 문제로 내원하는 모든 환자에게 디지털 트윈을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절개 후 상태를 보며 수술 방법을 결정하던 순서가, 가상 공간에서 시나리오를 먼저 소진하고 수술실에 들어오는 방식으로 바뀌고 있다는 게 골자다.
방사선 조사량 최적화 … 암 부작용 줄이고 치료 효과 극대화
암 치료 영역에서도 디지털 트윈을 이용한 시도가 잇따르고 있다. 핵심은 실제 환자에게 방사선을 쏘기 전에 가상 종양에서 먼저 최적 용량을 찾아내는 방식이다.
미국 텍사스대학교(University of Texas) 연구팀은 고등급 뇌교종(High-grade Glioma) 환자 100명의 가상 코호트를 구성해 디지털 트윈 기반 방사선 치료 계획을 시뮬레이션했다. 현행 표준 치료(SOC)와 동일한 총 방사선량을 적용했을 때, 디지털 트윈 기반 개인 맞춤 요법은 종양 진행까지의 시간을 중앙값 기준 6일 더 늦췄다. 반대로 종양 제어 수준을 표준 치료와 동일하게 유지하면서 방사선량을 줄이는 방식으로 접근하면, 총 조사량을 16.7%(10Gy) 낮출 수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 정상 조직에 가해지는 불필요한 방사선을 줄이면서 치료 효과는 극대화하는 셈이다.
디지털 트윈은 면역항암제·화학요법·방사선 등 복수의 치료 모달리티에 대한 종양 반응을 동시에 시뮬레이션해 맞춤형 치료 계획을 수립하고, 환자 상태 변화에 따라 실시간으로 업데이트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분석이다. 미국 MD앤더슨 암센터(MD Anderson Cancer Center)는 디지털 트윈이 환자 개인의 분자 정보와 약물 반응을 통합해 맞춤 치료를 지원하고, 임상시험을 가상으로 시뮬레이션해 신약 개발을 가속할 수 있다고 국제 학술지 '네이처 암 연구 리뷰(Nature Reviews Cancer)'에 보고하기도 했다.
시행착오는 가상 공간에서 … 환자 안전 최우선 시대로
지금까지 의사는 치료하면서 표적을 찾았다. 부정맥 시술 중 부정맥을 유발해 회로를 확인하고, 절개 후 상태를 보며 수술 방법을 결정하고, 방사선 조사 후 반응을 보며 용량을 조정했다. 환자의 몸이 시행착오의 공간이 됐던 셈이다.
하지만 디지털 트윈은 이 순서를 뒤집는다. 모든 시행착오를 가상 공간으로 옮기고, 의사는 검증된 계획을 들고 시술실에 들어온다. 결과적으로 불필요한 시술 시간이 줄어들고 재시술 가능성도 낮아지는 것이다. 제조업에서 시작된 혁신 기술이 의료 현장에서 '환자 안전'이라는 새로운 가치를 실현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