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8월 12일 오후, 서울시 중구 T타워에서 의사인력 수급추계위원회 제1차 회의가 열리고 있다.[헬스코리아뉴스 / 서정필] 오는 2월, 정부가 2027학년도 의대 정원을 발표한다. 이르면 설 연휴 이전, 늦어도 2월 중에는 결과가 공개될 예정이다. 이번 발표는 지난해 출범한 보건복지부 산하 '의사인력 수급추계위원회(이하 추계위)' 체제에서 도출된 첫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상징성이 크다. 정부의 일방적 결정이 아니라, 전문 기구의 데이터를 반영한 첫 사례가 어느 정도의 설득력을 얻느냐에 따라, 향후 추계위의 존립 동력도 결정될 전망이다.
'결정 후 통보'에서 '추계 후 논의'로… 패러다임의 변화
의대 정원 문제는 2020년 문재인 정부 시절 의료계 총파업과 2024년 윤석열 정부의 '2000명 증원' 사태를 거치며 막대한 사회적 비용을 치러왔다. 추계위는 정원을 먼저 정하고 명분을 찾던 기존 방식에서 탈피해, 객관적 데이터를 통해 수급을 먼저 예측하고 그 위에서 정원을 논의하겠다는 구조적 전환의 산물이다.
지난해 하반기 가동된 추계위는 10여 차례 회의 끝에 12월 말 의사 수급 추계 결과를 확정했다. 이 자료는 현재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보정심)로 넘어가 2027학년도 정원 범위를 정하는 기초 자료로 쓰이고 있다. 다만, 위원 간 이견과 의료계 반발로 인해 최종 규모 확정까지는 진통이 예상된다.
"절차적 진전은 환영하나 '졸속' 우려 지워야"
이러한 제도적 변화에 대해 전문가들은 기대와 우려를 동시에 내비치고 있다. 신현영 서울성모병원 가정의학과 교수(제21대 국회의원)는 "정부가 숫자를 일방적으로 던지던 방식에서 벗어나 절차적 정당성을 갖추려 한 점은 의미 있는 첫걸음"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운영 내실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 신 교수는 "AI의 의사 대체율이나 주 4.5일제 도입 등 급변하는 노동 환경을 반영할 정교한 변수가 부족한 상태에서 단기간에 도출된 결과는 '졸속'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네덜란드 모델처럼 정치적 외풍에서 자유로운 독립 기구가 고도의 시뮬레이션을 수행하는 체계로 진화해야 현장의 불신을 해소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의사인력 수급추계위원회 첫 논의부터 지금까지 정치권의 동상이몽: '제도 안착' vs '실질 협치' vs '구조 재편'
추계위를 바라보는 여야의 온도 차는 뚜렷했다. 지난 1월 8일 열린 '2026년 의료계 신년하례회' 등에서 각 정당은 선명한 스탠스를 보였다.
#더불어민주당: 사회적 합의와 기능 확장 주력
더불어민주당은 추계위를 실질적인 사회적 합의 기구로 안착시켜야 한다는 입장이다. 김윤 의원은 추계위를 "사회적 합의로 만들어진 협의체"로 규정하며 투명한 논의 기반을 강조했고, 이수진 의원은 공공 부문 인력을 정밀 분석할 수 있도록 추계위 체계를 확장하는 법안을 발의하며 제도적 뒷받침에 나섰다.
#국민의힘: 소통을 통한 파트너십 강조
국민의힘은 의료계의 실질적 참여를 이끌어내는 '신뢰 회복'에 방점을 찍었다. 김예지 의원은 현장의 절박함이 정책 언어로만 소모되는 것을 경계했고, 전문의 출신인 한지아 의원은 수치 중심의 속도전보다 정교한 소통을 제안했다. 서명옥 의원은 의료계를 정책 대상이 아닌 '실행 동반자'로 정의하며 실질적인 협치를 핵심 가치로 내세웠다.
#비교섭 3당: 독립성 결여와 거수기 전락 경계
조국혁신당, 개혁신당, 진보당은 추계위의 구조적 한계를 강하게 질타했다. 김선민 의원(조국혁신당)은 데이터의 투명한 공개와 거버넌스 재편을 요구했고, 이주영 의원(개혁신당)은 "정부 영향력 아래의 졸속 기구로는 현장 신뢰를 얻지 못할 것"이라며 직격했다. 전종덕 의원(진보당)은 지역 공공의대 설립 등 본질적 목적에 부합하는 추계를 촉구하며 정부의 '증원 명분 쌓기용 거수기'가 되는 것을 막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의사협회, 근본적 불신 표출... "2024년의 재판 될 것"
대한의사협회 김성근 대변인대한의사협회(의협)는 현재의 논의 구조를 '후진적 행태'로 규정하며 강한 유감을 표명했다. 김성근 의협 대변인은 지난 29일 브리핑에서 "비전문적인 위원들이 다수결로 사안을 결정하는 것은 의료대란을 촉발한 2024년의 과오를 되풀이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공급 추계조차 제대로 결론 내지 못한 부실 자료를 보정심에 넘긴 상황에서 정원을 확정하려는 시도는 '참고 자료' 이상의 가치를 가질 수 없다"고 지적하며 전문가의 목소리가 실질적으로 반영되는 구조적 변화를 촉구했다.
추계위 데이터, 정책적 효능감 입증할 수 있을까?
결국 2월로 예정된 2027년 의대 정원 발표는 추계위라는 새로운 실험이 한국 의료 정책의 핵심 기제로 안착할 수 있을지를 판가름하는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추계위가 산출한 데이터가 현장의 불신을 뚫고 지역 의료 격차 해소와 필수 의료 유지라는 목표를 향한 정책적 효능감을 발휘할 수 있을지, 대한민국 의료계의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