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해 AI 도구로 제작한 이미지. [사진=제미나이][헬스코리아뉴스 / 이순호] 국내 제약사들이 창업주 시대의 성공 방정식이었던 오너 중심 경영 체제에서 벗어나, 전문성과 시스템에 기반한 전문경영인 체제를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있다. 달라진 보건 안보 패러다임, 천문학적으로 증가하는 신약 개발 비용, 고도로 복잡해진 글로벌 시장 규제 등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는 경영 환경에 대응하기 위해서다.
기업들 사이에서는 단순히 '빠른 추격자(Fast Follower)'에서 벗어나 '시장 선도자(First Mover)'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오너의 강력한 리더십에 더해, 산업 전반에 대한 깊은 통찰과 전문성을 갖춘 리더십이 필수적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이러한 배경에서 시스템 경영으로의 완전한 전환, 오너와 전문경영인이 협력하는 '하이브리드' 모델 등 다채로운 지배구조 변화가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
전문경영인 체제가 빠르게 자리잡아가고 있는 제약사로는 #한미약품그룹이 꼽힌다. 경영권 분쟁을 마무리하고 전문경영인 체제를 본격화한 한미약품그룹은 올해 2분기 지주회사인 한미사이언스와 사업회사인 한미약품 모두에서 안정적인 실적을 기록하며 시장의 우려를 불식시켰다.
한미약품그룹의 지주회사 한미사이언스는 지난 3월 열린 정기 주주총회에서 김재교 신임 대표를 선임했다. 고(故) 임성기 창업주의 배우자인 송영숙 한미약품그룹 회장은 지주사 한미사이언스 대표직을 내놨다. 창업주 일가와 대주주는 글로벌 빅파마 '머크'의 방식처럼 전문경영인을 지원하고 관리·감독하는 역할에 집중하기로 했다. 핵심 사업회사인 한미약품도 같은 날 주총에서 최인영 한미약품 R&D센터장(사내이사), 김재교 한미사이언스 대표(기타비상무이사) 등의 이사 선임을 승인했다.
이러한 전문경영인 체제 전환은 곧바로 실적으로 나타났다. 한미사이언스는 2분기 연결재무제표 기준 당기 매출 3383억 원, 영업이익 346억 원, 순이익 283억 원을 달성했다.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9.4% 증가했으며, 영업이익과 순이익도 각각 30.7%, 39.2% 늘었다.
핵심 사업회사인 한미약품도 고지혈증 치료제 '로수젯' 등 자체 개발한 블록버스터 제품들의 압도적인 성과에 힘입어 같은 기간 당기 매출 3613억 원, 영업이익 604억 원이라는 호실적을 달성했다.
이는 시장의 불확실성을 딛고 시스템과 전문성으로 이뤄낸 성과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는 평가다.
중추신경계(CNS) 질환 치료제 시장 강자인 #명인제약도 전문경영인 체제를 예고했다.
금융감독원에 최근 제출된 명인제약 정정 증권신고서에 따르면, 회사는 중장기적인 경영 계획상 전문성 제고를 위해 전문경영인 체제 전환을 명시했다. 중장기적으로 오너 중심이 아닌 전문경영인 체계를 구축하고, 이사회 중심 경영 구조를 확립한다는 것이다.
이행명 명인제약 회장은 15일 열린 기업공개(IPO) 기업설명회에서 이처럼 전문경영인 체제를 도입해 소유와 경영을 분리하겠다는 계획을 분명히 했다.
이 회장은 "경영은 능력 있는 전문경영인이 맡아야 한다는 것이 저의 소신"이라며 "소유와 경영을 분리해 3∼4년 이내 전문경영인 체제로 전환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명인제약은 이미 정관 변경도 마친 상태다. 대표이사의 임기는 기본 2년이고, 1회 중임할 수 있도록 했다. 다만, 이사회의 3분의 2 이상의 의결 후 주주총회에 산정, 발행주식 총수의 2분의 1 이상의 의결이 있을 때는 4년 임기를 마친 뒤에도 1회에 한해 2년간 임기를 더 연장할 더 수 있게 했다.
즉, 대표이사의 임기를 최대 6년으로 제한한 것이다. 차후 대표이사의 임기가 3년으로 변경되면 중임까지(총 6년)만 가능하게 했다.
올해 오너 2세 경영을 본격화한 #삼진제약은 최용주 전 대표의 후임으로 김상진 사장을 지난 5월 경영총괄로 영입하며 오너가와 전문경영인의 시너지 효과를 노린 '하이브리드' 경영을 이어가고 있다.
김상진(서울대학교 약학대학, 졸) 사장은 1991년 한국얀센에 입사 후, 2006년 홍콩얀센 사장, 2008년 대만얀센 사장, 2011년 한국얀센 사장을 차례대로 역임했으며, 2013년 한독 부사장과 2018년 삼일제약 대표에 이르기까지 업계 전반에 걸친 풍부한 경험과 전문성을 쌓아왔다.
이번 인사는 외부 전문경영인 영입으로 성장동력을 확보하고, 향후 기업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전략적 결정이다.
삼진제약은 이번 김상진 사장의 합류로 경영 역량 극대화와 이를 통한 글로벌 사업 확대 및 신제품 개발 등 핵심 부문에서 새로운 성장 동력을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창업주와 오너 일가가 중심이 됐던 국내 제약사들의 이러한 전문경영인 체제로의 무게 이동은 글로벌 시장에서 통하는 지속가능한 성장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한 필연적인 체질 개선이라는 분석이다.
우선, 신약 하나를 개발하기 위해서는 천문학적인 비용과 시간이 투입되며, 미국 FDA, 유럽 EMA 등 까다로운 규제 장벽을 넘어야 한다. 이는 오너의 강력한 카리스마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사안이다. R&D와 글로벌 마케팅, 인허가 등 각 분야에 대한 깊이 있는 전문성을 지닌 전문경영인의 필요성이 커진 이유다.
'오너 리스크' 관리와 투명성 강화에 대한 시장의 요구도 전문경영인 체제를 도입하는 제약사가 늘어나고 있는 이유 중 하나다. 전문경영인 체제는 오너 리스크를 최소화하고, 투자자들에게 경영의 안정성과 투명성을 보장하는 효과적인 장치로 평가받는다.
업계 관계자는 "국내 제약업계의 지배구조가 오너 경영 또는 전문경영인 체제 중 어느 한쪽으로 획일화되기보다는, 각 기업의 성장 단계와 전략적 목표에 따라 최적화된 형태로 진화할 가능성이 크다"며 "중요한 것은 CEO가 누구냐가 아니라, 얼마나 전문적이고 투명한 시스템을 통해 회사를 운영하고 예측 가능한 성장을 만들어내느냐에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전문경영인 활용 확대는 인물 중심의 경영에서 시스템 중심의 경영으로 나아가는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라며 "이러한 변화가 국내 제약사들이 글로벌 선진 기업으로 도약하는 데 밑거름이 될지 주목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