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건복지부 [헬스코리아뉴스 / 임도이] 정부가 먹는 임신중지약을 국가 의료체계 안으로 정식 도입하기로 했다. 임신 초기 약물을 이용한 임신중지가 제도권 의료 안으로 들어오는 첫 단계다.
다만 실제 도입 방식을 놓고 의료계와 시민사회에서는 서로 다른 요구가 나오고 있다. 산부인과의사회는 도입 자체에는 반대하지 않지만 관련 법률 정비와 응급의료체계, 의료인에 대한 법적 보호가 먼저 마련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반면 여성·시민단체들은 안전을 이유로 의료기관 방문이나 원내 복용 등을 과도하게 의무화할 경우 임신중지 당사자의 접근성을 떨어뜨릴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성평등가족부와 보건복지부, 식품의약품안전처는 16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제14회 국가정책조정회의에서 '인공임신중지 약물 도입 방안'을 논의했다. 정부는 그동안 음성적으로 유통돼 온 임신중지약을 국가 의료체계 안에서 허가·관리해 여성의 건강과 안전을 확보한다는 방침이다.
정부는 "2019년 4월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이후에도 후속 입법과 임신중지약 도입이 지연되면서 불법 유통 약물 사용, 임신중지 방법 선택권 제한, 시술 지연에 따른 비용 증가 등의 문제가 이어졌다"고 설명했다.
현재 식약처에서는 수입품목으로 신청된 임신중지약에 대한 허가·심사를 진행 중이다. 해당 약물은 임상시험 자료 등을 토대로 임신 63일, 즉 임신 9주 이내 사용하는 것으로 허가 신청됐다. 식약처는 안전성과 유효성, 품질뿐 아니라 시판 후 이상사례 수집·평가와 환자·전문가 교육자료 등을 포함한 의약품 위해성 관리계획도 함께 검토한다.
도입 초기에는 비교적 강한 관리체계가 적용될 전망이다. 복지부는 허가 후 2년 동안 의료기관 안에서 의사가 직접 처방하고 조제하는 것을 원칙으로 운영한 뒤, 부작용과 안전성 자료를 검토해 사용 범위를 단계적으로 확대하는 방안을 검토하기로 했다.
임신중지약은 미페프리스톤과 미소프로스톨을 이용해 임신을 종결하는 약물요법으로, 국내에서는 흔히 '미프진'으로 알려져 있다.
산부인과의사회 "도입 자체 반대 아냐…입법 공백부터 해결해야"
대한산부인과의사회는 정부 발표 직후 입장문을 내고 "도입 자체를 원칙적으로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다만 "형법상 낙태죄 조항의 효력이 2021년 1월 사라진 이후에도 후속 입법이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행정지침만으로 임신중지약을 도입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의사회가 가장 우려하는 부분은 응급상황에 대한 대응이다. 임신중지약 사용 후 불완전유산이나 과다출혈 등이 발생하면 수술적 처치나 응급의료가 필요할 수 있는 만큼, 후속 진료가 가능한 의료기관과 응급이송체계, 관련 수가 등이 먼저 갖춰져야 한다는 것이다.
의료인의 법적 지위도 문제로 제기했다. 현행 법률이 임신중지를 둘러싼 허용 범위와 의료행위의 법적 근거를 명확히 규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사회·경제적 사유 등에 따른 임신중지약을 처방할 경우 의료인이 형사처벌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에 따라 의사회는 형법과 모자보건법 개정, 임신중지약의 허가·처방·조제·투약·부작용 보고에 관한 법적 근거 마련, 응급진료체계 구축, 참여 의료인의 법적 보호와 처방을 거부하는 산부인과 의사에 대한 보호방안 마련 등을 국회에 요구했다.
시민단체 "과학적 근거보다 강한 규제부터 적용해선 안 돼"
반대로 여성·시민사회단체들은 정부가 안전성을 이유로 지나치게 보수적인 사용 조건을 설정할 가능성을 경계하고 있다.
'모두의안전한임신중지를위한권리보장네트워크'는 15일 성명을 내고 "임신중지 의약품을 가장 보수적으로가 아니라 과학적 근거를 기반으로 접근 가능하게 도입해야 한다"며 "임신당사자의 선택을 가로막는 과도한 이용 제한에 반대한다"고 밝혔다.
이 단체는 "임신중지 의약품은 이미 전 세계적으로 오랜 기간 사용돼 왔고, 안전성과 효과에 관한 근거가 충분히 축적된 의약품"이라며 "의료기관 방문과 대기, 원내 복용과 관찰을 반복적으로 요구한다면 그 부담은 결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지 않을뿐더러 약물적 임신중지를 포기하게 만드는 장벽이 된다"고 주장했다.
특히 "약물 사용 장소를 의료기관으로 한정하거나 의사의 직접 관찰을 의무화할 경우 병원 방문이 어려운 사람에게 부담이 집중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안전성을 높인다는 이유로 접근 자체를 어렵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들은 "일본은 2023년 임신중지 의약품을 허가하면서 병상을 갖춘 의료기관에서의 사용과 의료진의 관찰 등 강한 제한을 두었다"며 "그 결과 이용할 수 있는 의료기관이 제한되고 접근성의 격차가 발생했다"고 지적했다.
정부가 정식 도입 방침을 확정하면서 국내 임신중지약 논의는 이제 '허용 여부'에서 '어떤 조건으로 사용할 것인가'로 옮겨갈 전망이다. 식약처의 품목 허가 여부와 함께 처방·조제 방식, 의료기관 요건, 응급대응체계, 의료인의 법적 책임과 임신당사자의 접근성을 어느 수준에서 조정할지가 향후 제도 설계의 주요 쟁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