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스코리아뉴스 / 임해리] 반복적인 유산이나 조산 등 심각한 임신 합병증 위험이 높은 항인지질증후군(antiphospholipid syndrome, APS) 임신부에게 새로운 치료 선택지가 열릴 가능성이 커졌다.
벨기에 제약사 UCB는 9일(현지시간) 미국 식품의약국(FDA)이 자사의 종양괴사인자(TNF) 억제제 '심지아(Cimzia, 성분명: 서톨리주맙 페골·certolizumab pegol)'를 항인지질증후군 임신부의 태반 매개 임신 합병증 예방을 위한 혁신치료제(Breakthrough Therapy)로 지정했다고 밝혔다. 기존 표준치료에 심지아를 추가하는 방식이다.
대상은 루푸스 항응고인자(lupus anticoagulant, LA) 양성이면서 과거 임신 관련 합병증이나 혈전 발생 이력 때문에 유산 등의 위험이 높은 성인 임신부다. 현재 미국에서 이 같은 항인지질증후군 관련 임신 합병증 예방 목적으로 FDA 승인을 받은 치료제는 없다.
항인지질증후군은 항인지질항체가 혈액응고 과정 등에 영향을 미쳐 정맥이나 동맥 혈전뿐 아니라 임신 중 태반 기능 이상을 일으킬 수 있는 자가면역질환이다. 임신부에서는 반복 유산이나 태아 사망, 중증 전자간증, 태반 기능부전, 조산 등의 위험을 높일 수 있다.
현재 고위험 임신 환자에게는 저용량 아스피린과 저분자량 헤파린 등 항응고치료가 주로 사용된다. 하지만 이러한 치료를 받아도 일부 환자에서는 태반 관련 임신 합병증이 발생해 추가 치료법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돼 왔다.
반복 유산이나 조산 등 심각한 임신 합병증 위험이 높은 항인지질증후군 임신부에게 새로운 치료 선택지가 열릴 가능성이 커졌다. [AI 생성이미지]항인지질증후군의 태반 합병증 예방에 사용
심지아는 류마티스관절염, 크론병, 건선성관절염, 강직성척추염 등 여러 염증성·자가면역질환에 이미 사용되고 있는 TNF 억제제다. 이번 개발은 기존 자가면역질환 치료제를 임신 중 항인지질증후군의 태반 합병증 예방이라는 새로운 영역으로 확장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심지아가 임신부 치료 후보로 선택된 배경에는 태반 통과가 매우 적다는 특성도 있다. 기존 임신부 대상 약동학 연구에서는 임신 후기 산모에게 투여한 서톨리주맙 페골이 신생아 혈중에서 대부분 검출되지 않거나 극미량만 검출돼 태아 노출이 매우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FDA의 이번 지정은 연구자 주도 2상 임상 'IMPACT' 결과를 근거로 이뤄졌다. 연구진은 항인지질증후군과 루푸스 항응고인자 양성을 보이는 고위험 임신부에게 기존 저분자량 헤파린과 저용량 아스피린 치료에 심지아를 추가했다.
연구에는 모두 51명이 참여했다. 주요 평가변수는 임신 10주 이후 태아 사망, 중증 전자간증 또는 태반 기능부전으로 인한 임신 34주 이전 분만을 하나로 묶은 복합지표였다.
분석 결과 51명 가운데 9명(17.6%)에서 주요 임신 이상 결과가 나타났다. 임신 10주 이전 유산이나 유전적 이상에 따른 태아 사망 6명을 제외한 평가대상 45명에서는 9명(20%)이 주요 평가변수에 해당했다. 연구진이 사전에 비교 기준으로 설정한 유사 고위험 환자의 과거 대조군 발생률 약 40%보다 낮아 미리 정한 유효성 기준을 충족했다.
심지아 투여군의 분만 시 중앙값 임신기간은 36.5주였으며, 신생아의 퇴원 시점 생존율은 93%였다. 중대한 감염은 발생하지 않았고 새로운 루푸스 발병이나 중증 악화도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IMPACT는 무작위배정 위약대조시험이 아니라 단일군·공개형 2상 시험이다. 실제 효과는 과거 대조군과 비교해 평가됐기 때문에 보다 큰 규모의 대조 임상을 통한 확인이 필요하다.
美, 혁신치료제·희귀의약품 잇단 지정
FDA의 혁신치료제 지정은 중증 또는 생명을 위협하는 질환에서 예비 임상근거가 기존 치료보다 중요한 개선 가능성을 보여줄 경우 개발과 심사를 신속하게 지원하는 제도다. FDA는 앞서 올해 3월 심지아를 같은 적응증의 희귀의약품으로도 지정했다. FDA 희귀의약품 데이터베이스에는 현재 해당 적응증의 승인 상태가 '미승인'으로 등록돼 있다.
항인지질증후군 임신 합병증에는 혈전 형성뿐 아니라 태반의 염증 반응이 관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TNF-α가 이러한 염증 과정에 관여한다는 연구를 바탕으로, 항응고제만으로 막기 어려운 태반 손상을 TNF 억제를 통해 줄일 수 있다는 것이 심지아 개발의 기본 전략이다.
기존 표준치료가 주로 혈전 형성을 억제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면 심지아는 염증 경로를 동시에 겨냥한다는 점에서 접근 방식이 다르다. 향후 임상시험에서 효능과 안전성이 입증되면 항인지질증후군 임신부의 임신 합병증 예방을 위한 첫 FDA 승인 치료제가 될 가능성이 높다.
[알아두면 좋은 상식] 반복 유산은 얼마나 흔할까?
임신 중 유산은 드물지 않다. 여러 연구를 종합한 분석에 따르면 임상적으로 확인된 임신 100건 가운데 약 15건은 유산으로 끝나는 것으로 추정된다.
여성 기준으로 보면 한 번 유산을 경험하는 비율은 약 10.8%, 두 번은 1.9%, 세 번 이상은 0.7%로 보고됐다. 즉 유산 자체는 비교적 흔하지만, 두 차례 이상 반복되는 경우는 훨씬 적다는 얘기다.
유산의 가장 흔한 원인은 태아의 염색체 이상이다. 특히 초기 유산의 상당수는 수정 과정에서 발생한 염색체 수 이상과 관련돼 있다. 이런 위험은 여성의 연령이 높아질수록 커진다. 이 밖에 자궁 구조 이상, 갑상선질환이나 당뇨병 같은 내분비질환, 혈전·자가면역질환 등도 반복 유산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원인을 찾지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최근 메타분석에서는 반복 유산 사례 가운데 원인불명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고, 후천성 혈전성 요인과 내분비·해부학적 요인 등이 뒤를 이었다.
항인지질증후군(APS)은 반복 유산과 관련된 대표적인 후천성 혈전성 질환이다. 미국생식의학회(ASRM)는 반복 유산 여성의 약 5~20%에서 항인지질항체가 확인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다만 항인지질항체 양성만으로 곧바로 APS로 진단하는 것은 아니며, 임상 기준과 혈액검사 결과를 함께 확인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