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장수인의 면역계에서 CD4 보조 T세포가 CD4 세포독성 T림프구(CD4 CTL)로 전환된 뒤 특정 클론으로 증식하고 다양한 하위유형으로 나뉘는 과정을 보여준다. [자료=Cell Reports][헬스코리아뉴스 / 임해리] 인간의 면역체계에는 CD4 세포독성 T림프구(CD4 cytotoxic T lymphocyte, CD4 CTL)라는 특수한 면역세포가 있다. 일반적인 CD4 T세포가 다른 면역세포의 활동을 돕는 역할을 한다면, CD4 CTL은 일부 암에서 종양세포를 직접 공격할 수 있는 세포독성 기능까지 갖는다.
특정 항원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면 같은 항원을 인식하는 T세포가 선택적으로 늘어나는 '클론 증식(clonal expansion)'도 일어난다. 최근 이 같은 CD4 CTL의 증식이 암이나 감염뿐 아니라 건강한 초장수와도 연관될 가능성을 보여주는 연구 결과가 나와 관심을 끌고 있다.
일본 오사카대학교(The University of Osaka) 단백질연구소와 이화학연구소(RIKEN), 게이오대학교 의과대학(Keio University School of Medicine) 공동연구팀은 CD4 CTL이 약 100세 전후부터 뚜렷하게 증가하고, 110세 이상 초장수인에서는 특히 높은 비율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연구 결과는 지난 19일 국제학술지 '셀 리포츠(Cell Reports)'에 발표됐다. 논문 제목은 '초장수인의 CD4 CTL: 건강한 노화에서 나타나는 적응적 확장의 징후(CD4 CTLs in supercentenarians: Signs of adaptive expansion in healthy aging)'다.
100세 전후부터 증가…110세 이상에서 17.6%
연구팀은 70~90대 8명, 100~109세 10명, 110세 이상 초장수인 10명 등 모두 28명의 혈액에서 T세포를 분리했다. 이어 단일세포 수준에서 유전자 발현과 세포 표면 단백질, T세포수용체(T-cell receptor, TCR) 서열을 동시에 분석했다. 주 분석에는 모두 4만 3584개의 T세포가 포함됐다.
분석 결과, 연령이 높아질수록 CD4 CTL 비율은 뚜렷하게 증가했다. 전체 T세포 가운데 CD4 CTL이 차지하는 비율의 중앙값은 70~90대에서 4.0%였으나, 100~109세에서는 9.6%, 110세 이상에서는 17.6%로 높아졌다. 이는 110세 이상 초장수인의 T세포 100개 가운데 약 18개가 CD4 CTL이었다는 의미다.
70~90대, 100~109세, 110세 이상 참가자의 T세포를 단일세포 수준에서 분석한 결과, CD4 세포독성 T림프구(CD4 CTL)의 비율은 연령이 높아질수록 증가했다. 오른쪽 하단 그래프는 0세부터 110세 이상까지 1512개 공개 샘플에서도 초고령기에 CD4 CTL 비율이 크게 높아지는 흐름을 보여준다. [자료=Cell Reports]연구팀은 이번 연구를 자체 연구 대상(28명)만으로 끝내지 않았다. 6개의 공개 단일세포 데이터세트를 추가해 생후 0세부터 110세 이상까지 1512개 샘플, 500만 개 이상의 세포를 통합 분석했다.
그 결과 젊은 연령층에서는 낮게 유지되던 CD4 CTL 비율이 초고령기에 접어들면서 크게 증가하는 흐름이 다시 확인됐다.
다만 이 현상이 100세 이상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었다. 100세 미만 참가자 한 명에서도 연구 대상 가운데 가장 높은 CD4 CTL 비율이 관찰됐다. 이 참가자는 임상적으로 건강했다.
연구진은 이를 근거로 CD4 CTL 증가가 초장수인에게만 나타나는 고유한 현상이라기보다, 100세 전후부터 빈도가 높아지는 면역 적응 현상일 가능성을 제시했다.
오래 자극받아도 '지치지 않은' 면역세포
CD4 CTL은 단순히 숫자만 늘어난 것이 아니었다. 연구팀은 CD4 보조 T세포가 CD4 CTL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공동자극분자인 CD27과 CD28을 순차적으로 잃는 현상을 확인했다.
특히 CD27 음성·CD28 양성(CD27−CD28+) 세포가 보조 T세포에서 세포독성 T세포로 넘어가는 중간 단계로 나타났다. 이는 원래 다른 면역세포를 돕던 CD4 T세포가 나이가 들면서 직접 표적세포를 공격하는 '킬러형' 세포로 바뀌는 과정이 단계적으로 진행된다는 뜻이다. 이 세포는 전체 CD4 T세포의 10.5%를 차지했다. 반대 형태인 CD27 양성·CD28 음성 세포는 0.3% 미만이었다.
이는 CD27이 먼저 사라지고 이후 CD28이 소실되면서 CD4 CTL로 분화한다는 흐름을 뒷받침한다. 중간 단계 세포에서는 그랜자임(granzyme)과 퍼포린(perforin) 등 세포독성 관련 유전자도 보조 T세포와 완전히 분화한 CD4 CTL 사이 수준으로 발현됐다.
더 흥미로운 점은 이 세포들이 고도로 분화했으면서도 '탈진(exhaustion)' 상태에 빠진 흔적이 적었다는 것이다. CD4 CTL에서는 면역세포 탈진과 관련된 PD-1이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았고, TIGIT·CTLA4·LAG3 등 탈진 관련 유전자의 발현도 낮았다.
제1저자인 오사카대학교 하시모토 고스케(Kosuke Hashimoto) 부교수는 "면역 노화는 단순히 기능이 저하되는 과정이 아니다"며 "특정 T세포의 선택적 증식은 극심한 노령에서도 면역계가 노화 관련 문제에 계속 적응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고 설명했다.
특정 T세포 하나가 절반 이상 차지
T세포수용체 분석에서는 특정 CD4 CTL이 반복적으로 복제된 흔적도 확인됐다. 연구팀이 각 참가자의 CD4 CTL을 클론별로 분석한 결과, 가장 큰 클론이 해당 CD4 CTL 전체의 평균 33.3%를 차지했다.
100세 이상 참가자 한 명에서는 단일 클론이 CD4 CTL 234개 가운데 126개, 53.8%를 차지했다. 같은 T세포가 오랜 기간 반복적으로 증식했다는 의미다.
연구진은 이를 특정 항원에 장기간 노출된 결과로 해석했다. 다만 클론 증식 자체는 70~90대에서도 관찰됐다. 따라서 클론 확장만으로 초장수인의 높은 CD4 CTL 비율을 설명할 수는 없으며, 항원에 노출된 기간이나 다른 면역 환경이 함께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
폐암·유방암·간암 환자의 T세포 서열과 겹쳐
이번 연구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대목은 CD4 CTL이 어떤 항원을 상대하고 있었는지를 추적한 결과다.
연구팀은 각 참가자에서 가장 많이 증식한 CD4 CTL의 T세포수용체 CDR3β 서열을 공개 데이터베이스 TCRdb2.0과 비교했다. 이 데이터베이스에는 건강인과 질환자의 샘플에서 얻은 6억 9000만 개 이상의 CDR3β 서열이 들어 있다.
연구진은 초장수인 등의 주요 CD4 CTL 클론과 정확히 일치하는 서열 617건을 찾았다. 이 가운데 해당 샘플에서 일정 수준 이상 클론 증식이 확인된 것은 36건이었다.
놀랍게도 36건 중 32건이 암 환자의 샘플에서 나온 서열이었다. 암종별로는 비소세포폐암(NSCLC)이 17건, 유방암이 9건, 간세포암이 6건이었다. 일부 동일한 CDR3β 서열은 비소세포폐암 환자의 종양 조직뿐 아니라 종양 주변 조직과 혈액에서도 반복적으로 나타났다.
연구팀이 CD4 CTL의 T세포수용체 CDR3β 서열을 공개 데이터베이스와 비교한 결과, 일치한 617건 가운데 36건에서 클론 증식이 확인됐고 이 중 32건은 암 환자 샘플에서 나온 서열이었다. 오른쪽 표는 일부 동일 서열이 비소세포폐암 환자의 종양·종양 주변 조직·혈액에서 반복적으로 확인된 사례를 보여준다. [자료=Cell Reports]그렇다고 연구 대상 초장수인들이 폐암이나 유방암, 간암을 앓았던 것은 아니다. 100세 이상과 110세 이상 참가자 가운데 해당 암의 병력이 확인된 사람은 없었다. 초장수인 한 명에게 피부암 병력이 있었고, 100세 이상 두 명에게 치매가 있었지만 알츠하이머병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
연구팀은 CD4 CTL이 아직 임상적으로 확인되지 않은 비정상 세포를 조기에 인식했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다만 연구진은 "일부 CD4 CTL이 암 관련 표적을 인식할 가능성은 있지만 정확한 표적은 아직 알 수 없다"고 선을 그었다.
'면역 노화=쇠퇴' 공식에 변화 가능성
이번 연구는 노화와 면역을 바라보는 관점에도 변화를 제시한다. 젊은 시기에는 다양한 T세포수용체를 가진 면역세포가 수많은 새로운 항원에 대응한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흉선 기능이 떨어지고 새로운 미경험 T세포 생산은 감소한다.
연구진은 이 과정에서 면역계가 무작정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경험한 항원이나 몸 안에 지속적으로 남는 항원에 더 많은 자원을 배분할 수 있다고 봤다.
초고령기에는 암세포, 노화세포, 다시 활성화된 잠복 바이러스처럼 오랫동안 남는 '지속성 항원(persistent antigen)'이 늘어난다. 이때 CD4 CTL이 선택적으로 증식하면서 면역계의 대응 우선순위가 바뀔 수 있다는 설명이다.
실험실에서 CD4 CTL을 자극했을 때도 세포독성 관련 유전자인 GZMB와 PRF1 발현이 증가했고, 염증성 사이토카인 인터페론 감마(IFN-γ)와 종양괴사인자 알파(TNF-α)도 증가했다.
같은 T세포 클론 안에서도 서로 다른 인터루킨을 분비하는 여러 하위유형이 나타났다. 연구팀은 이를 환경에 따라 기능을 바꿀 수 있는 '가소성(plasticity)'의 증거로 해석했다.
하시모토 부교수는 "나이가 들면서 노화세포와 암세포를 포함한 비정상 세포가 더 흔해진다"며 "이번 연구 결과는 이러한 변화에 대한 면역계의 적응이 예외적인 장수에 기여할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CD4 CTL 많다고 오래 사는 것 입증한 연구는 아냐"
다만, 연구 결과를 장수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이번 연구는 혈액 속 T세포를 분석한 관찰 연구다. CD4 CTL이 실제 인체 조직에서 어떤 세포나 항원을 찾아 제거하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암 환자 데이터베이스와의 일치 역시 T세포수용체의 CDR3β 서열만을 비교한 탐색적 결과다. 같은 CDR3β 서열이 발견됐다고 해서 반드시 같은 암 항원을 인식한다는 뜻은 아니다.
T세포수용체와 세포 표면 단백질 등을 직접 정밀 분석한 대상도 28명으로 제한적이었다. 연구팀은 이를 보완하기 위해 1512개 공개 샘플을 추가 분석했지만, 초장수인의 세부 면역 특성을 확인하려면 더 많은 대상자를 통한 검증이 필요하다. 연구진은 개인별 차이가 결과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을 인정했다.
그럼에도 이번 연구는 110세 이상까지 건강하게 살아온 사람들의 면역계가 단순히 덜 늙은 것이 아니라, 노화 과정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위협에 맞춰 계속 재편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초장수의 비밀은 강한 면역계 자체보다 끝까지 변화하고 적응할 수 있는 면역계의 능력에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