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세포의 특정 RNA를 인식하면 활성화돼 DNA를 광범위하게 절단하는 CRISPR 효소 Cas12a2를 표현한 이미지. [사진=KTSDesign/Science Photo Library·네이처 홈페이지 갈무리][헬스코리아뉴스 / 이창용] 암세포가 만드는 특정 RNA를 인식한 뒤 세포의 DNA를 광범위하게 절단해 스스로 죽게 만드는 새로운 CRISPR 기반 항암전략이 등장했다.
기존 CRISPR 기술이 특정 유전자를 정밀하게 잘라내거나 교정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면, 이번 기술은 암세포의 유전적 특징을 식별하는 순간 일종의 '분자 살상 스위치'를 켜 해당 세포의 유전체에 광범위한 DNA 손상을 일으킨다.
국제학술지 네이처(Nature)는 최근 서로 다른 연구팀이 CRISPR 효소 'Cas12a2'를 이용해 세포와 동물모델에서 사람유두종바이러스(HPV) 감염 암세포와 KRAS·TP53 변이 암세포를 선택적으로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고 소개했다.
연구 결과는 네이처에 각각 'RNA-triggered cell killing with CRISPR–Cas12a2'와 'Targeting cancer-specific mutations with RNA-triggered chromatin shredding'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됐다.
CRISPR 효소 Cas12a2를 이용해 표적 RNA를 발현하는 세포를 선택적으로 제거한 첫 번째 연구 논문. [사진=네이처 홈페이지 갈무리]표적 RNA 인식하면 DNA 광범위 절단
Cas12a2는 세균이 바이러스 감염을 막는 데 사용하는 CRISPR 방어효소다. 일반적인 유전자 교정 효소와 달리 자신에게 맞는 표적 메신저RNA(mRNA)를 발견하면 활성화돼 주변의 이중가닥 DNA를 광범위하게 절단하는 특성을 지닌다.
연구진은 이 기능을 암세포 제거에 활용했다. 암세포에서 만들어지는 바이러스 RNA나 변이 유전자 RNA를 Cas12a2의 작동 신호로 삼고, 표적 RNA가 없는 세포에서는 효소가 활성화되지 않도록 설계한 것이다.
첫 번째 연구에서 연구진은 Cas12a2가 활성화된 사람 세포에서 광범위한 DNA 이중가닥 절단이 발생하고 세포주기가 멈춘 뒤 주로 세포자멸사로 이어지는 것을 확인했다. 표적 RNA가 없는 세포에서는 뚜렷한 DNA 손상이나 세포 감소가 나타나지 않았다.
연구진이 HPV18의 암 유발 단백질 E6·E7을 만드는 RNA를 표적으로 삼자 HPV 양성 자궁경부암 세포가 대조군보다 94% 감소했다. 같은 치료를 HPV가 없는 세포에 적용했을 때는 유의한 세포 감소가 나타나지 않았다.
HPV16 양성 두경부 편평세포암 환자에게서 얻은 암세포를 이식한 마우스 모델에서는 지질나노입자에 담은 Cas12a2 mRNA와 가이드RNA를 종양 안에 투여했다. 그 결과 대조군보다 종양 성장이 유의하게 억제됐고, 종양 조직에서 세포자멸사 지표도 확인됐다.
KRAS 변이 세포 50~62% 제거…표적항암제 병용 시 85% 이상 감소
연구진은 대표적인 암 유발 변이인 'KRAS G12C'도 표적으로 삼았다. KRAS G12C는 KRAS 유전자의 12번째 아미노산이 글리신에서 시스테인으로 바뀌는 변이로, 세포 증식 신호를 지속적으로 활성화한다.
Cas12a2는 KRAS G12C 변이 RNA를 과발현한 세포를 62% 줄였지만 야생형 KRAS RNA를 과발현한 세포에는 뚜렷한 영향을 주지 않았다.
KRAS G12C 변이를 자연적으로 보유한 폐암세포주 NCI-H23에서도 세포가 약 50% 감소했다. 미국 식품의약국(FDA)이 승인한 KRAS G12C 억제제 '소토라십(sotorasib)' 단독 처리에서는 대조군 대비 세포가 65% 감소했으며, Cas12a2와 병용했을 때 세포 감소 폭은 85% 이상으로 확대됐다.
소토라십에 내성을 갖도록 만든 암세포에서도 Cas12a2는 약 51%의 세포 감소 효과를 보였다. 연구진은 기존 표적항암제에 내성이 생긴 암에서도 보완적인 치료전략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평가했다.
연구에 사용한 사람 세포와 가이드RNA 조건에서는 측정 가능한 비표적 활성이 관찰되지 않았다. 가이드RNA와 두 개의 염기가 맞지 않는 경우에도 사람 세포에서 측정 가능한 세포 제거는 나타나지 않았다.
승인 치료제 없는 TP53 변이도 단일 염기 수준 구별
두 번째 연구팀은 Cas12a2를 이용해 암세포의 염색질을 광범위하게 절단하는 'RNA 유도 염색질 분쇄' 전략을 제시했다.
암 특이적 전사체를 표적으로 Cas12a2가 염색질을 광범위하게 절단하도록 설계한 두 번째 연구 논문 초록. [사진=네이처 홈페이지 갈무리]연구진은 암세포에 존재하는 특정 변이 RNA를 Cas12a2가 인식하도록 프로그래밍했다. 표적을 찾은 Cas12a2는 염색질을 절단하고 DNA 손상 반응과 세포사멸을 유도했다.
특히 현재 승인된 표적치료제가 없는 것으로 알려진 TP53 변이 R248Q·R280K·E285K를 단일 염기 수준에서 구별해 표적화했다.
TP53은 종양 억제 단백질 p53을 만드는 유전자로, 전체 암의 약 40~50%에서 변이가 발견된다. 그러나 변이 p53 단백질은 약물이 결합할 수 있는 뚜렷한 구조가 부족해 오랫동안 대표적인 '약물화하기 어려운' 표적으로 꼽혀왔다.
연구진은 이 밖에도 MYC가 과도하게 발현된 암세포와 EGFR 유전자의 인프레임 결실로 만들어진 암 특이적 RNA 접합부를 표적으로 삼아 암세포를 제거했다.
지질나노입자를 이용해 Cas12a2 mRNA와 가이드RNA를 체내에 전달한 실험에서는 MYC 유발 간암과 TP53 변이 폐암 마우스 모델의 종양 부담이 감소했다.
"프로그래밍 가능한 화학요법"…임상 적용까지는 과제
연구진은 Cas12a2가 암세포의 특징적인 RNA를 '신분증'처럼 읽은 뒤 해당 세포의 DNA를 광범위하게 파괴한다는 점에서 기존 항암제와 차별화된다고 설명했다.
양 리우(Yang Liu) 미국 유타대학교 의과대학 연구자는 네이처에 "특정 RNA를 인식하는 분자 살상 스위치"라며 "본질적으로 프로그래밍 가능한 화학요법"이라고 평가했다.
독일 바이오기업 아크리비온 테라퓨틱스(Akribion Therapeutics)는 HPV로 발생한 두경부암을 표적으로 이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회사는 2030년까지 첫 임상시험 데이터를 확보한다는 목표다.
임상 적용까지 해결해야 할 과제도 적지 않다. Cas12a2와 가이드RNA를 암세포에만 효율적으로 전달해야 하고, 정상조직에서 예기치 않게 효소가 활성화되는지 장기적으로 검증해야 한다.
광범위한 DNA 손상에서 살아남은 세포에 염색체 이상이나 새로운 돌연변이가 생길 가능성, 세포사멸 과정에서 발생하는 염증과 전신 면역반응도 규명해야 한다.
연구진은 표적 선택 범위를 넓히고 정확도를 높이는 효소 개량, 가이드RNA 설계법 개선, 바이러스·비바이러스 전달체 개발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번 연구는 아직 세포와 동물모델에서 가능성을 확인한 전임상 단계다. 그러나 약물이 결합할 공간이 없어 직접 공략하기 어려웠던 변이 단백질을 억제하는 대신, 해당 변이에서 생성되는 RNA를 감지해 암세포를 제거한다는 점에서 새로운 정밀 항암전략으로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