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가켐바이오 사옥 (사진=리가켐바이오)[헬스코리아뉴스 / 서정필] 리가켐바이오사이언스가 신약 개발 초기 단계 기술이전(License-out)에 의존하던 기존 사업모델에서 벗어나 자체 후기 임상과 패키지 딜, 독자 허가를 추진하는 새로운 성장 전략을 내놓았다. 충분한 자금력과 플랫폼 경쟁력을 바탕으로 글로벌 빅파마로 도약하겠다는 구상이다.
리가켐바이오는 지난 8일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글로벌 R&D 데이에서 이 같은 내용을 골자로 하는 차세대 성장 전략 'LCB 2.0'을 발표했다. 핵심은 초기 기술이전보다 임상 2·3상 등 후기 개발을 직접 수행해 신약의 가치를 극대화하고, 중국 기업들의 항체-약물접합체(ADC) 공세에 대응하기 위해 차세대 플랫폼 경쟁력을 확보하겠다는 것이다.
이 같은 전략은 과거 초기 기술수출 중심 사업모델에서 벗어나 자체 후기 임상과 플랫폼 경쟁력을 기반으로 글로벌 제약사로 성장한 버텍스(Vertex Pharmaceuticals)와 바이오젠(Biogen)의 성장 과정과 닮았다는 평가가 나온다.
버텍스처럼…'조기 기술이전'에서 '후기 임상'으로
1989년 창립한 버텍스는 우수한 저분자 화합물 설계 역량을 보유하도고 자금부족으로 개발 초기 단계에 글로벌 제약사에 권리를 넘기는 전형적인 바이오텍 모델에 머물렀다.
실제 버텍스는 1993년 에이즈 치료 후보물질 소유권을 글락소웰컴(Glaxo Wellcome, 현 GSK)에 조기에 넘겼고, 2000년에는 암·관절염 표적 후보물질 8종을 글로벌 빅파마 노바티스(Novartis)에 일괄 이전하는 패키지 계약을 맺었다.
이 시절 버텍스는 창사 후 20년 가까이 단 한 번도 흑자를 내지 못하는 만성 적자에 허덕였다. 조기 기술 수출로 받는 계약금과 마일스톤은 당장의 연구개발비와 생존 자금 역할에 그쳤다.
반전은 2000년대 중반 낭성섬유증(CF) 치료제 플랫폼을 개발하면서 시작됐다. 버텍스는 더 이상 초기 기술이전을 선택하지 않고 후기 임상까지 직접 수행하는 전략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 시기 역시 막대한 후기 임상 비용 지출로 적자는 이어졌으나, 신약의 판권을 끝까지 유지하며 기업 가치를 극한으로 끌어올리는 인고의 시간을 보냈다.
자체 후기 임상을 통해 신약의 가치를 지킨 결실은 2012년부터 쏟아지기 시작했다. 버텍스는 2012년 세계 최초의 낭성섬유증 치료제 '칼리데코'의 FDA 승인을 시작으로 '오캄비', '심데코', 그리고 2019년 삼중 병용요법인 '트리카프타'까지 잇달아 자체 출시하며 사실상 세계 낭성섬유증 치료 시장의 90%를 독점하며 막대한 이익을 챙겼다.
그 결과 버텍스는 2010년대 후반 흑자 전환에 성공했고, 현재는 연간 매출 120억 달러, 영업이익 40억 달러를 웃도는 독점적 이익 구조를 갖춘 메가 빅파마로 전격 탈바꿈했다.
바이오젠처럼… 초격차 플랫폼으로 경쟁력 강화
리가켐바이오가 강조한 또 다른 축은 차세대 플랫폼 경쟁력이다. 회사는 중국 기업들의 ADC 개발 경쟁이 치열해지는 상황에서 차세대 플랫폼을 통해 기술적 진입장벽을 더욱 높이겠다는 전략을 제시했다. 이는 과거 바이오젠이 선택했던 성장 전략과도 유사하다.
바이오젠은 2010년대 중반 전통적인 소분자 의약품이나 단순 항체 시장이 제네릭과 바이오시밀러의 공세로 레드오션이 되자 생존을 위한 대전환을 감행했다. 2016년을 기점으로 진입장벽이 극도로 높은 차세대 모달리티(Modality, 치료 접근법)인 AAV 기반 유전자 치료제와 안티센스 올리고뉴클레오타이드(ASO) 플랫폼에 역량을 집중하며 후발 주자들이 넘볼 수 없는 압도적인 기술 격차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후기 임상 단계 후보물질을 기반으로 글로벌 파트너들과 공동개발 및 수익 분배 구조를 구축했다. 대표적으로 일본 에자이(Eisai)와 알츠하이머 치료제 공동 개발을 추진해 글로벌 시장 진출에 성공했다.
아울러 임상 후기 단계의 신약 후보물질을 기반으로 글로벌 파트너사와 대등한 조건의 계약을 성사시켰다. 대표적으로 2010년대 후반부터 일본 에사이(Eisai)와 50대 50 수준의 글로벌 공동 개발 및 이익 분배 계약을 맺고 임상 후 단계를 이끌었으며, 그 결과 2020년대 들어 세계 최초의 알츠하이머 치료제들을 시장에 성공적으로 안착시키며 리스크 분산과 수익 극대화를 동시에 이뤄냈다.
이는 차세대 ADC 플랫폼을 무기로 시장의 초격차를 유지하고 후기 단계에서 천문학적인 대형 패키지 계약을 지향하는 리가켐바이오의 성장 전략과 정확히 맞물리는 대목이다.
일본 오노약품·다이이찌산쿄 사례도 주목
아시아에서는 일본 기업들의 성장 사례도 리가켐바이오 전략과 비교된다.
오노약품공업(Ono Pharmaceutical)은 혁신 면역항암제인 '옵디보(Opdivo, 성분명: 니볼루맙·Nivolumab)'를 개발하고도 자금 부족으로 인해 2011년 한국·일본·대만을 제외한 초기 글로벌 판권을 브리스톨 마이어스 스퀴브(BMS)에 이전했다. 하지만 2014년 출시된 '옵디보'가 세계적 히트를 기록하며 막대한 로열티(현금 자산)가 쌓이자, 2020년대 들어 경영 방침을 완전히 전환했다. 더 이상 초기 기술수출(L/O)에 의존하지 않는 글로벌 연구개발 기업으로 완벽하게 체질을 바꾼 것이다.
다이이찌산쿄(Daiichi Sankyo) 역시 독보적인 DXd ADC 플랫폼 기술을 무기로 글로벌 초격차를 만든 뒤 비즈니스 모델을 고도화한 사례다. 지난 2019년 아스트라제네카(AstraZeneca)와 공동 개발 계약을 맺은 데 이어, 2023년에는 머크(Merck·MSD)와 최대 220억 달러(약 30조 원) 규모의 초대형 '패키지 딜'을 성사시키며 글로벌 ADC 시장의 절대 강자로 군림하고 있다.
리가켐바이오가 LCB 2.0을 통해 자체 글로벌 후기 임상과 플랫폼 초격차를 동시에 달성하겠다는 전략 역시 이들 일본 기업들의 성장 전략과 맥을 같이한다는 분석이다.
현금 1조원·ADC 플랫폼…실행 기반 갖췄다
리가켐바이오는 자사 전략을 실행할 수 있는 가장 큰 강점으로 자금력과 플랫폼 경쟁력을 내세운다.
회사는 최근 국민성장펀드로부터 5000억 원 규모의 직접 투자를 유치했다. 기존 보유 현금 약 4500억~5000억 원을 포함하면 현재 확보한 현금성 자산만 약 1조 원 규모다.
이는 국내 바이오텍 수준에서는 유례가 없는 초대형 자산 규모다. 업계는 이 정도의 자금력이면 글로벌 CRO(임상시험수탁기관)를 본격적으로 가동해 수천억 원이 소요되는 글로벌 임상 2·3상을 자체적으로 제어하고 완수할 수 있는 가장 든든한 기초 체력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기술 경쟁력도 강점이다. 리가켐바이오는 차세대 ADC 플랫폼 기술 '콘주올(ConjuALL)'을 지속적으로 고도화하고 있으며, 다발성골수종 치료 후보물질 'LCB43(anti-BCMA ADC)' 등 후기 개발 단계 진입을 앞둔 파이프라인도 줄줄이 확보하고 있다. 이들 자산은 향후 수십 조 원 규모의 초대형 대규모 패키지 딜을 이끌어낼 핵심 미래 자산으로 평가받고 있다.
성패는 후기 임상 성과가 좌우
업계는 이번 'LCB 2.0' 전략이 단순한 비전 제시에 그치지 않고 실제 실행 단계에 들어섰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1조 원의 실탄과 차세대 플랫폼이라는 확실한 무기를 쥐고 글로벌 빅파마들의 성장 궤적을 그대로 밟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성공 여부는 자체 후기 임상을 얼마나 안정적으로 수행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분석이다.
특히 이중항체 ADC 후보물질 'LCB36(anti-CD20/CD22 ADC)'의 글로벌 임상 1상 데이터 확보 및 임상 2상 진입 여부, 그리고 독자적인 글로벌 후기 임상 컨트롤 타워 역할을 수행할 미국 현지 법인 레코캠바이오 US(LegoChemBio US)의 글로벌 임상 운영 역량이 향후 전략의 성패를 가를 핵심 변수로 꼽힌다.
리가켐바이오가 아시아를 넘어 글로벌 빅파마들의 성장 공식을 현실화할 수 있을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