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헬스코리아뉴스 / 이충만 기자]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 미국 대통령이 추진하는 최혜국(Most Favored Nation, MFN) 약가 정책의 불똥이 북유럽 복지 모델로 튀고 있다. 미국 내 약값을 낮추려는 조치가 의도치 않게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등 북유럽 국가들의 의약품 공급망과 환자 접근성을 위협하는 모양새다.
30일 시장조사 전문업체 글로벌 데이터(Global Data)에 따르면, MFN 약가 정책이 북유럽 국가의 신약 공급 체계에 심각한 악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 약가, OECD 최저 수준에 맞추는 MFN 정책의 명암
MFN은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2025년 5월 발동한 행정명령으로, 미국의 고가 의약품 가격을 다른 선진국 중 가장 낮은 수준에 맞추도록 강제하는 정책이다.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미국의 60% 이상인 OECD 회원국들이 지불하는 약가의 최저가를 기준으로 약값을 책정해 미국 환자의 부담을 경감하겠다는 취지였다.
문제는 이러한 미국의 약가 인하 기조가 전통적으로 보편적 복지를 지향해 온 북유럽 국가들에 예상치 못한 타격을 주고 있다는 점이다. 글로벌 빅파마들이 약값이 싼 북유럽에 자사 신약을 먼저 출시할 경우, 이때 결정된 약값이 트럼프식 약가 정책의 기준점이 되면서 미국 출시 때 낮은 약가를 받을 수 있고, 이 때문에 북유럽에서의 신약 출시를 꺼리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북유럽 국가들은 강력한 정부 주도의 약가 통제를 통해 이미 유럽 평균보다 5% 이상 낮은 저약가 기조를 유지해 왔다.
수치상 5%라는 차이는 미미해 보일 수 있으나, 시장의 전략적 가치를 고려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북유럽 국가의 공공 의료 시스템은 매우 높게 평가받지만, 절대적인 처방량과 매출 규모 면에서는 독일,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등 핵심 권역에 비해 시장 규모가 현저히 작은 게 현실이다.
'시장 가치' 하락한 북유럽 ... 글로벌 빅파마의 수익 리스크로 전락
이 때문에 북유럽 국가들은 신약의 공급 순위에서도 독일,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등 다른 유럽지역의 핵심 권역에 비해 밀려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제약사들이 유럽의 핵심 권역과 미국 시장의 수익성을 보존하기 위해 북유럽 내 신약 출시를 의도적으로 지연시키거나 배제하는 이른바 '북유럽 패싱'이 가속화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글로벌 데이터의 분석 결과를 보면, 2025년 5월부터 2026년 3월까지 유럽 전역의 신약 출시는 전년 대비 무려 35%나 감소한 것으로 집계됐다. 북유럽에 대한 '의도적 패싱'이 유럽 전체의 신약 출시 감소로 이어진 것으로 풀이된다.
결국 글로벌 빅파마들에게 전 세계 의약품 수요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는 미국은 최우선 시장이고, 유럽의 주요 거점 시장들 역시 포기할 수 없는 핵심 수익원이지만, 북유럽의 낮은 수익 구조는 매출 목표를 위협하는 리스크가 되고 있는 셈이다.
북유럽 각국 정부, 범정부 차원 대응책 마련에 분주
사태가 심각해지자 북유럽 내 위기감은 최고조에 달하고 있다. 스웨덴과 덴마크 제약협회(LIF)가 최근 기업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대다수 기업이 북유럽 내 신약 출시 전략을 보류하거나 전면 수정할 방침인 것으로 확인됐다. 사실상 북유럽이 글로벌 신약 공급망의 사각지대로 전락할 수 있다는 우려가 현실로 다가온 셈이다.
이에 덴마크와 스웨덴 정부는 범정부 차원의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하고 정밀 실태 조사에 착수했다. 특히 노르웨이에서는 야당인 진보당(FRP)을 중심으로 의약품 지불 용의액(WTP, Willingness To Pay) 기준을 물가 상승률과 연동해 상향 조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까지 나오고 있다.
WTP란 정부나 보험자가 특정 의약품의 치료 가치를 인정해 기꺼이 지불할 수 있는 최대 금액을 의미한다. 그동안 저약가 정책을 고수해 온 노르웨이가 이 기준을 높이겠다고 나선 것은, 약값을 조금 더 올려주더라도 기업들의 수익성을 보전해줌으로써 '북유럽 패싱'을 막고 신약 공급의 공백을 최소화하겠다는 고육지책으로 풀이된다.
미국의 자국 우선주의 약가 정책이 전 세계 보편적 복지의 상징이었던 북유럽의 약가 통제 시스템마저 변화시키는 강력한 '나비효과'를 불러오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