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식품의약국(FDA)이 희귀 유전질환인 헌터증후군의 신경학적 증상 치료를 위한 신약 '아블라야'를 3월 25일(현지 시간) 가속 승인했다. (사진=FDA)[헬스코리아뉴스 / 서정필] 두꺼운 성벽에 가로막혀 구호 물자를 전달하지 못했던 고립된 도시에 마침내 '트로이의 목마'가 입성했다. 의학계의 난제로 불리던 '혈액-뇌 장벽(BBB)'을 통과해 아이들의 뇌 신경 손상을 직접 치료하는 혁신 신약이 마침내 세상에 나왔다.
미국 식품의약국(FDA)은 25일(현지 시간), 희귀 유전질환인 헌터증후군(뮤코다당증 II형·MPS II)의 신경학적 증상 치료를 위한 신약 '아블라야(Avlayah, 성분명: 티비데노푸스프 알파-에크엔엠·tividenofusp alfa-eknm)'를 가속 승인했다. 개발사는 미국 덴알리 테라퓨틱스(Denali Therapeutics, 이하 덴알리)다. 이번 승인은 신경학적 손상이 심하게 진행되기 전 단계의 5kg 이상 소아 환자를 대상으로 하며, 주 1회 정맥 주사 방식으로 투여된다.
마티 마카리(Marty Makary) FDA 국장은 이번 승인에 대해 "오늘은 헌터증후군과 싸우고 있는 어린이들과 그 가족들에게 이정표와 같은 날"이라며 "FDA는 규제적 유연성을 발휘함과 동시에 법적 의무에 따라 실질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약물을 승인했으며, 앞으로도 희귀 질환 치료를 가속화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희귀 X 연관 유전질환 … 전세계 환자 2000명, 대부분 남아에서 발병
'헌터증후군'은 세포 내 리소좀에서 당 분자(글리코사미노글리칸·GAG, Glycosaminoglycan)가 정상적으로 분해되지 못하고 축적되는 희귀 유전질환이다. 이 축적물은 골격, 심장, 호흡기뿐 아니라 뇌가지 침투해 전신 장기의 발달 이상을 유발한다. X 염색체 연관 질환인 탓에 거의 대부분 남아에서 발병한다. 미국 내 환자는 약 500명, 전 세계적으로 약 2000명이 이 질환과 싸우고 있다. 환자들은 인지·행동 저하, 청력 손실, 언어 및 보행 능력 상실 등 심각한 신경학적 합병증을 겪는다.
그러나 기존의 효소 대체 요법은 말초 장기 증상 개선에는 효과적이지만, 뇌를 보호하는 방어막인 '혈액-뇌 장벽(BBB, Blood-Brain Barrier)'을 통과하지 못해 뇌 신경계 손상을 막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BBB는 유해 물질이 혈액을 통해 뇌로 유입되는 것을 막아주지만, 치료 목적의 약물도 통과하지 못하게 막아 중추신경계 질환 치료제 개발의 가장 큰 걸림돌로 꼽혀 왔다. '아블라야'는 이러한 BBB의 높은 벽을 넘어 헌터증후군의 신경학적 증상을 직접 겨냥하는 최초의 FDA 승인 치료제로 기록됐다.
트랜스페린 수용체 활용해 뇌 장벽 통과 … '트랜스포트비하클' 플랫폼 첫 상용화
'아블라야'가 BBB를 넘는 핵심 열쇠는 트랜스페린 수용체(TfR, Transferrin Receptor)다. 트랜스페린 수용체는 뇌세포가 혈액 속 철분을 흡수할 때 이용하는 관문으로, 뇌 혈관 벽에 다량 분포한다. 개발사인 덴알리는 이 수용체에 결합하는 '수송 매체'를 설계하고 여기에 IDS 효소를 붙여 하나의 융합 단백질로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트랜스포트비하클(TransportVehicle™)' 플랫폼이다. 쉽게 말해 트랜스포트비하클은 약물을 뇌 안으로 실어 나르는 '운반체' 역할을 하고, '아블라야'는 이 운반체에 IDS 효소를 탑재해 완성한 실제 치료제인 셈이다. 마치 트로이 목마처럼 트랜스페린 수용체를 통해 BBB를 통과한 뒤, 뇌와 말초 조직 모두에 효소를 전달하는 것이라고 개발사는 설명했다. 이는 생물의약품을 뇌까지 전달하는 오랜 난제를 극복한 사례로, '아블라야'는 이 플랫폼을 활용해 탄생한 첫 번째 FDA 승인 약물이다.
1/2상서 뇌척수액 헤파란 황산 24주 만에 평균 91% 감소 … 93% 정상 범위 회복
이번 승인의 근거는 생후 3개월~13세 소아 환자 47명을 등록한 국제 다기관 공개 1/2상 임상 시험이다. 핵심 평가 지표는 뇌척수액(Cerebrospinal Fluid·CSF)의 일종인 '헤파란 황산(Heparan Sulfate·HS)' 수치였다. 헤파란 황산은 GAG의 일종으로, 정상인에서는 IDS 효소에 의해 분해되지만 헌터증후군 환자에서는 뇌를 포함한 전신 세포에 축적돼 신경 손상과 장기 기능 저하를 유발하는 핵심 원인 물질이다. 뇌척수액 헤파란 황산이 얼마나 줄어드느냐가 곧 뇌 신경 손상이 얼마나 억제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척도다.
투여 후 24주 시점에 해당 수치 측정이 가능했던 44명에게서 기저치 대비 평균 91%(95% CI: 89%, 92%) 감소가 확인됐다. 투여 전에는 정상 범위 이내인 환자가 단 한 명도 없었지만, 24주 후에는 93%(44명 중 41명)가 정상 상한치 이하로 회복됐다. 해당 결과는 2026년 1월 1일자 뉴잉글랜드 의학저널(NEJM)에 게재된 바 있다.
피터 친(Peter Chin) '덴알리' 최고의학책임자(CMO)는 "'아블라야'의 가속 승인은 중추신경계와 말초 조직 모두에 도달하도록 설계된 최초이자 유일한 FDA 승인 효소 대체 요법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진전"이라며 "이번 승인을 가능하게 해주신 임상 참여 환자와 가족, 연구자, 임상의, 옹호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고 밝혔다.
정식 승인 전환 위해 96주 COMPASS 확증 임상 진행 중
이번 가속 승인은 뇌척수액 '헤파란 황산' 감소라는 대리 지표를 근거로 이뤄진 것으로, 정식 승인 전환을 위해서는 실제 임상적 유효성을 입증하는 확증 임상 결과가 필요하다. 현재 95% 이상 등록이 완료된 96주 확증 임상 'COMPASS 시험(NCT05371613)'이 그 역할을 맡고 있다. 해당 시험은 '아블라야'와 기존 치료제인 '이두설파제(Idursulfase)'를 2대 1로 무작위 배정 비교하는 방식으로, 북미·남미·유럽에서 글로벌 승인을 목표로 진행 중이다.
투여는 반드시 의료 모니터링이 가능한 환경에서 시작해야 하며, ▲빈혈 위험에 따른 헤모글로빈(Hemoglobin) 정기 모니터링 ▲막성 신병증(Membranous Nephropathy·신장 필터 기능에 영향을 미치는 신장 질환) 위험에 따른 신기능 및 소변 단백 모니터링이 필요하다. 가장 흔한 이상 반응으로는 상기도 감염, 귀 감염, 발열, 빈혈, 기침, 구토, 설사, 발진, 두드러기 등이 보고됐다.
국내 환자 70~80명 … 연간 치료비 4억 원, 신경학적 치료는 여전히 공백
국내 헌터증후군 환자는 약 70~80명으로 추산된다. 현재 쓸 수 있는 치료제는 GC녹십자의 '헌터라제(성분명: 이두설파제-베타·idursulfase-beta)'와 사노피 젠자임(Sanofi Genzyme)의 '엘라프라제'(성분명: 이두설파제·idursulfase)' 두 가지뿐이다. 1인당 연간 치료비만 약 4억 원에 달한다. 따라서 뇌까지 닿는 치료제를 기다려온 국내 환자들에게 '아블라야'는 새로운 희망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라이언 왓츠(Ryan Watts) '덴알리' 공동창업자 겸 최고경영자(CEO)는 "'아블라야' 승인은 헌터증후군 커뮤니티에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라며 "이번 성과는 생물의약품을 뇌까지 전달하는 오랜 난제를 극복할 수 있는 '트랜스포트비하클' 플랫폼의 가능성을 입증한 이정표"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