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식품의약국(FDA) 전경 [사진= 미국 식품의약국(FDA) 공식 페이스북][헬스코리아뉴스 / 이충만] 미충족 의료 수요 해소를 목적으로 도입된 의약품 조건부 허가 제도가 유독 미국 식품의약국(FDA)에서만 활발하게 운용되면서 그 배경에 관심이 쏠린다.
조건부 허가 제도는 의료 수요가 높은 질환에 대해 신약 후보물질의 유효성이 아직 완전히 입증되지 않았지만, 제한된 조건 하에서 임시로 허가를 부여하는 제도이다.
FDA는 조건부 허가 제도를 가장 먼저 도입한 곳이기도 하다. 1980년대 유행하던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 에이즈 바이러스) 감염에 대응하기 위해 논의하기 시작했는데, 1992년 가속 승인(Accelerated Approval)이라는 명칭으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어 유럽의약품청(EMA)과 우리나라 식품의약품안전처는 각각 2006년과 2012년에 조건부 허가 제도를 도입했다. 두 기관 모두 FDA와 마찬가지로 항암제, 희귀의약품 등 중대 질환에 신속히 대응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그런데 이후 조건부 허가 제도를 가장 활발하게 활용하는 곳은 FDA뿐이다. 제도를 가장 먼저 도입한 만큼, 훨씬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은 얼핏 당연해 보이지만, 그럼에도 다른 나라 규제기관에 비해 제도를 남발하는 것 아니냐는 인상을 풍긴다.
본지 취재 결과, 2024년 EMA와 식약처가 조건부 허가를 부여한 품목은 각각 8개, 4개에 그친 반면 FDA는 무려 21개 품목을 조건부로 허가했다.
가장 큰 이유는 역시 규제의 느슨함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EMA는 약물 후보물질에 대한 임상 시험의 예비 데이터가 상당히 유망해야 하고, 향후 확증 임상 실시 계획이 명확하거나 이미 진행 중이어야 조건부 허가를 부여한다.
게다가 조건부 허가는 한 번 취득한 이후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1년마다 재평가를 통해 갱신해야 한다. 만약 정해진 기준을 충족하지 못할 경우 조건부 허가는 취소된다.
식약처는 1년 단위 갱신 조건을 두지는 않았지만, 조건부 허가 시점부터 3년 이내에 확증 임상을 완료할 것을 권고하는 것은 물론, 일정 기간 내 최종 임상 결과 제출 의무를 부과한다.
하지만 FDA는 확증 임상 실시를 조건으로 내걸고는 있으나, 기간 내 완료를 의무화하지 않기 때문에 업체 입장에서는 임상 종료를 치일피일 미루며 조건부 허가 지위를 유지한다.
조산 예방제 '마케나'(Makena, 성분명: 하이드록시프로게스테론 카프로에이트·hydroxyprogesterone caproate)가 대표적인 사례다. 이 약물은 2011년 2월 FDA로부터 가속 승인을 받았으나, 원 개발사 파산과 소유권 이전 등 여러 이유로 확증 임상이 계속 지연된 끝에 결국 약 12년 만인 2023년 4월에야 조건부 허가가 취소됐다.
제도에 허점이 많다 보니, 기존에 합의된 규칙보다 FDA의 임의적인 재량권이 훨씬 넓게 행사되는터라 치료 효과가 불분명한 약물도 허가를 받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알츠하이머 치료제 '아두헬름'(Aduhelm, 성분명: 아두카누맙·aducanumab)의 경우, FDA는 산하 자문위원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2021년 독단적으로 가속 승인을 강행했다. 그러나 실효성 논란으로 인해 제대로 활용되지 못한 채 시장에서 퇴출되었다.
'아두헬름' 이후 FDA의 가속 승인 제도에 개혁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이유다. 실제로 우리나라 감사원과 비슷한 역할을 하는 미국 감찰부(Office of Inspector General, OIG)는 올해 1월, FDA 가속 승인 제도 개선 방안을 담은 보고서를 발간했다.
해당 보고서는 유럽 및 한국과 유사하게 ①약물 허가 전 또는 허가 후 일정 기간 내 확증 임상을 의무화하고 ②FDA 가속 승인 절차의 일관성을 확보하기 위한 새로운 내부 위원회 설립을 주요 개혁 과제로 제시했다.
다만 OIG는 우리나라 감사원이 헌법적으로 독립된 기관인 것과 달리, 행정부에 소속된 일반 정부 기관이기 때문에 구성원들이 대통령에 의해 비교적 쉽게 해임될 수 있어 독립성이 떨어지는 편이다.
따라서 FDA 가속 승인 제도의 개혁 여부는 트럼프 행정부의 의지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