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헬스코리아뉴스 / 이충만] 한때는 시한부로 여겨졌던 HIV(에이즈바이러스) 감염이 홍역처럼 완전 정복할 수 있는 질병으로 변모하는 양상이다.
시장조사 전문업체 아이큐비아(IQVIA)가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최근 10년간(2015년~2024년) 모든 지역에서 HIV 감염 치료제 투입 예산의 증가세는 두 자릿수에도 미치지 못했다. 특히 유럽은 투자금액 자체가 오히려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항암제 투자 흐름과도 대조적이다. 2015년 글로벌 항암제 투자 규모는 104억 달러(한화 약 15조 원)였으나, 2024년에는 3배 이상 증가한 321억 달러(한화 약 47조 원)로 추산된 바 있다.
아이큐비아 HIV 지역별 투자 규모 비교 그래프이를 두고 시장에서는 HIV 감염에 대한 치료법이 발전한 덕분에 기업들의 투자 의욕이 낮아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그만큼 질환정복에 가까워졌다는 얘기다.
아이큐비아 역시 "HIV 감염 치료법이 점차 표준화되면서 연구개발(R&D)에 대한 역동성이 떨어졌다"며 "(투자를 더 유인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혁신이 필요하다"고 진단했다.
HIV, 홍역과 유사한 흐름 보여
에이즈(AIDS)라고도 불리는 HIV 감염은 체내 면역 기능이 저하되는 질환이다.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면역세포의 활성이 저하되어 세균 및 바이러스 감염에 대한 방어력이 떨어지고, 합병증이 발생한다.
1980년대 초반 HIV 감염이 처음 보고되었을 때, 효과적인 항레트로바이러스 치료제는 전혀 없었다. 때문에 감염 자체가 곧 사망 선고처럼 여겨졌으며, 환자의 거의 대부분이 수년 내 사망했다. 당시 감염 환자의 기대 수명은 1년 남짓에 불과했다.
특히 HIV 감염은 동성애자, 마약 중독자, 매춘부 등 소수자 집단을 중심으로 크게 확산되면서 질병에 대한 과학적 이해보다는 이들 집단에 대한 사회적 낙인과 공포가 먼저 자리 잡는 계기가 되었고, 결국 걸리는 순간 시한부라는 오명이 따라붙었다.
각국 정부는 HIV 감염을 집중적으로 관리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민관 합동 태스크포스를 구성하는 등 기업의 치료제 개발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며 투자 확대를 촉진했다.
이에 따라 등장한 치료법이 칵테일 요법이다. 이 요법은 2가지 이상의 HIV 항바이러스제를 혼합한 것으로, 매일 경구제를 복용하여 바이러스의 활성을 건강한 성인과 유사한 수준으로 유지하는 방식이다.
최근에는 1년에 두 번만 주사해도 바이러스 활성을 낮출 수 있는 영국 GSK의 '카베누바'(Cabenuva, 성분명: 카보테그라비르+릴피비린·cabotegravir+rilpivirine)까지 허가를 받은 상황이다.
이처럼 HIV 감염 치료법이 획기적으로 발전하면서 기업들이 약물 개발에 투자할 만한 유인 요소가 상당히 사라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런 점에서 HIV는 홍역과 유사한 흐름을 보인다고 볼 수 있다. 홍역은 19세기에서 20세기 초반 학교, 군대, 도시 등 인구가 밀집된 지역에서 빠르게 퍼지며 사회적 공포를 불러일으켰지만, 백신이 개발된 이후에는 그 누구도 홍역 감염을 두려워하지 않는 시대가 됐다.
물론 HIV에 대한 백신은 아직 개발되지 않은 상황이지만, 이는 HIV 감염으로 인한 체내 자연적인 면역반응 자체가 거의 생기지 않기 때문에 항체 개발에 난항을 겪고 있는 것일 뿐, 바이러스 자체에 대한 연구와 분석은 이미 완료된 상태다.
가령 일부 사람들은 엘리트 컨트롤러(elite controllers)라 불리는 체내 독특한 기능을 지니고 있어 항바이러스제 없이도 바이러스 활성을 자연적으로 낮출 수 있다. 이 발견은 향후 HIV 백신 개발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를 받고 있는데, 이는 그만큼 HIV 바이러스에 대한 구조와 특성이 이미 상당 부분 밝혀진 상태라는 의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