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스코리아뉴스 / 서정필] '제2의 반도체', '1조 9000억 원의 청사진', '게임 체인저'. 3년 전 한국형 ARPA-H(KARPA-H)가 첫발을 뗐을 때 수식어는 화려했다. 대통령의 지시 한마디에 조 단위 예산이 움직였고, 보건의료의 난제를 단숨에 해결할 마법 지팡이처럼 묘사됐다. 하지만 화려한 수식어의 유통기한은 짧았다. 정책적 숙의가 빠진 '탑다운(Top-down)'식 기획은 곧 현장의 불신과 예산 삭감이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사업 시행 3년 차인 2026년, KARPA-H의 모습은 사뭇 달라져 있다. 1조 9000억 원이었던 몸집은 1조 1000억 원대로 줄었고, 도무지 입에 붙지 않던 생경한 영문 명칭들은 '필수의료 대응' 같은 직관적인 우리말로 바뀌었다. 누군가는 이를 '사업의 축소'라 비판할지 모르지만, 현장의 목소리는 다르다. 오히려 지난 3년의 혼란이 정치적 구호 속에 가려졌던 R&D의 본질을 되찾게 한 '예방주사'였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KARPA-H가 마주했던 진통은 사실 예견된 것이었다. 미국의 ARPA-H가 성공할 수 있었던 건 단순히 돈이 많아서가 아니었다. 관료의 간섭을 배제하고 프로젝트 매니저(PM)에게 전권을 부여하는 '전문가 중심의 신뢰'가 핵심이다. 반면 우리의 초기 모델은 행정 관료가 운전대를 잡고 과학자를 조수석에 앉힌 형국이었다. 전문가가 빠진 혁신 R&D는 길을 잃기 마련이고, 그 대가는 40%에 달하는 예산 삭감이라는 뼈아픈 성적표였다.
다행히 2026년의 KARPA-H는 '실용주의'라는 이름으로 체질 개선에 성공한 모양새다. 민간 과학자의 참여 비중을 70%까지 끌어올리고, 보여주기식 행정 대신 내실 있는 기획서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정치적 이벤트'에서 벗어나 비로소 '과학적 프로젝트'로 전환된 셈이다.
이제 남은 것은 증명이다. 2026년은 KARPA-H가 그동안의 부침을 딛고 실제 의료 현장에서 성과를 내야 하는 시기다. 국민은 더 이상 조 단위의 예산 숫자나 거창한 비전에 감동하지 않는다. 암 환자의 맞춤형 치료가 가능해졌는지, 감염병 위기에서 우리만의 백신 주권을 확보했는지와 같은 '체감형 성과'만이 이 프로젝트의 존립 근거를 증명할 수 있다.
표류를 멈춘 KARPA-H의 돛은 이제 방향을 잡았다. 하명(下命)에 의해 띄워진 배였을지언정, 목적지까지 배를 밀어 올리는 것은 결국 과학의 실력과 현장의 신뢰다. 지난 3년의 혼란이 헛되지 않으려면, 올해 우리는 '정치가 만든 신화'가 아닌 '과학이 만든 실천'을 목격해야 한다. [아래 관련기사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