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스코리아뉴스(헬코미디어)[헬스코리아뉴스] 정부 연구개발(R&D) 지원금이 기술과 실력보다 인맥과 기존 네트워크에 따라 배분된다는 불신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요즘도 심심치않게 '끼리끼리 나눠먹는다'는 말이 나온다.
특정 연구자나 기관이 과제 기획 단계부터 영향력을 행사하고, 기존 인맥을 활용해 연구비를 반복적으로 수주한다는 지적은 오래전부터 제기돼 왔다. 연구현장에서도 이런 관행에 대한 증언이 이어졌다.
논란은 2023년 다시 한번 불거졌다. 당시 정부는 연구비가 특정 집단에 편중되는 문제를 이른바 'R&D 카르텔'로 규정하고 대대적인 개혁에 나섰다. '나눠먹기·뿌려주기식 R&D'를 없애겠다며 사업을 통폐합하고 예산을 대폭 축소하기까지 했다. 과제 선정의 전문성과 투명성도 높이겠다고 약속했다.
그로부터 3년이 흘렀다. 그렇다면 지금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정부가 제도를 고치겠다고 선언하는 것과 현장의 관행이 실제로 바뀌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기술의 혁신성과 연구자의 실력보다 학맥과 인맥, 소속 기관의 영향력이 앞서는 일은 정말 사라졌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특정 기관이나 연구자가 비슷한 정부 과제를 반복적으로 수주하는 경우부터 짚어볼 필요가 있다. 뛰어난 연구성과를 인정받아 계속 지원받는 것이라면 문제 될 게 없다. 그러나 그 배경에 폐쇄적인 인적 네트워크가 작용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이를 구분할 수 있도록 선정 과정이 투명해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정부가 최근까지 연구과제 평가의 전문성과 책임성을 높이기 위한 제도 개선을 계속 추진하고 있다는 점은 눈여겨볼 대목이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지난해 11월 우수 평가위원 6000명을 확보하고 평가위원 실명제를 도입해 평가의 전문성과 책임성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과제 선정도 기존 평가등급 방식에서 벗어나 혁신성을 중심으로 바꾸겠다는 방침을 내놨다.
정부가 지금도 평가 체계를 손질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기존 제도에 보완해야 할 부분이 남아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바이오와 신약개발 분야에서는 평가자의 전문성이 특히 중요하다. 나노의약품과 유전자·세포치료제, 새로운 약물전달 플랫폼처럼 기존의 잣대로 평가하기 어려운 기술은 그 가치를 알아볼 전문가가 없으면 첫 관문부터 넘기 어렵다.
평가자가 기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익숙한 연구자나 유명 기관이 유리해질 가능성이 커진다. 사업계획서를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능력이 기술 자체보다 앞설 수도 있다. 이런 식으로 연구비가 배분된다면 혁신을 발굴하기보다 기존 연구생태계를 유지하는 '눈먼 돈'으로 전락할 우려가 있다.
최근 본지의 나노의약품 관련 기사에도 한 연구자가 답답함을 토로하는 댓글을 남겼다. 국내에는 새로운 기술을 제대로 평가할 전문가가 많지 않고, 정부 과제나 투자에서도 기술 자체보다 외형적인 조건이 중요하게 작용한다는 취지였다. 그는 "대한민국에서는 그저 외형적인 구성 요건을 보고 과제를 선정하고 투자를 진행하지, 절대 절대 기술만 보고 진행하는 것은 0.001%의 확률 게임"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물론 한 연구자의 경험을 전체 연구현실로 일반화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런 불신이 지금도 나온다는 사실은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정부가 제도 개선의 성과를 객관적인 자료로 보여줘야 하는 이유다.
정부 연구비의 명백한 부정사용도 여전히 적발되고 있다. 허위 인건비 계상이나 연구비 부당 사용 등은 과제 선정 단계의 '나눠먹기'와는 성격이 다르다. 그러나 국민 세금으로 조성된 연구비를 보다 엄격하고 투명하게 관리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같은 문제의식을 공유한다.
정부가 해야 할 일은 다름아니다. 평가위원의 전문성과 이해충돌 여부를 철저히 관리하고, 특정 기관과 연구자의 반복 수혜 현황도 분명하게 점검해야 한다. 첨단 기술에 대한 평가가 필요하다면 국내 인맥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해외 전문가를 참여시키는 방안도 적극 검토할 만하다.
무엇보다 정부는 과제 선정의 기준과 절차를 연구자들이 신뢰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탈락한 연구자가 결과에 동의하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왜 선정되고 왜 탈락했는지는 납득할 수 있어야 한다.
국가 R&D의 성패는 투자 규모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규모도 중요하지만 그 돈을 어떤 기술과 어떤 연구자에게 맡기느냐가 더 중요하다. 인맥보다 기술을, 간판보다 가능성을 보고 평가해야 한다.
정부가 2023년 '나눠먹기 R&D'를 없애겠다고 약속했다면 이제 그 성과를 보여줄 차례다. 적어도 연구현장에서 '끼리끼리'라는 말이 더 이상 나오지 않을 때 비로소 개혁의 성과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