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채훈의 클래식비평]광주시향, 교향악축제 첫 무대 큰 감동 선사
[이채훈의 클래식비평]광주시향, 교향악축제 첫 무대 큰 감동 선사
  • 이채훈 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전문기자
  • 승인 2023.06.02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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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수, 베토벤 협주곡 1번으로 갈채 받아
말러 , 지휘자·악단의 신뢰·호흡 인상적
▲이채훈 클래식 칼럼니스트/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전문기자/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전 MBC 음악PD
▲이채훈 클래식 칼럼니스트/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전문기자/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전 MBC 음악PD

첫곡은 엘가의 <님로드>, 생전에 교향악축제를 후원한 고 서영민 여사를 추모하는 시간이었다. 광주시향은 풍성한 음량과 질감으로 깊은 애도의 마음을 전했다. 이어서 베토벤 피아노협주곡 1번 C장조. 빈에서 정상의 음악가로 발돋움한 베토벤이 만 28살 생일 직후인 1798년 12월 18일 프라하에서 초연한 작품이다. 몇 년 전 빈 청중을 매료시킨 모차르트 협주곡의 전통을 잇고 있지만 베토벤 특유의 힘과 생기가 넘치는 곡이다. 귓병으로 절망하기 전 베토벤이 얼마나 올곧고 씩씩한 젊은이였는지 실감케 해 주는 작품이다. 

피아니스트 손민수는 싱그러운 음색으로 젊은 베토벤의 건강한 마음을 잘 표현했다. 1악장 알레그로 콘 브리오, 피아노와 오케스트라의 대화는 생기있게, 자연스레 이어졌다. 2악장, 피아노와 오케스트라가 따뜻한 마음을 주고받는 대목은 청중들에게 조용한 감동을 주었다. 3악장, 자유분방한 피아노의 질주에 이어 오케스트라가 극단적인 템포 변화와 함께 단호하게 마무리하자 청중들은 환호했다. ‘즉흥연주’하는 기분으로 연주하면 ‘베토벤다운’ 느낌을 더 진하게 살릴 수 있지 않았을까 싶은 대목이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청중들을 만족시킨 훌륭한 연주였다. 

홍석원 지휘의 광주시향은 임윤찬과 함께 베토벤 5번 <황제> 음반을 발매하여 호평을 받은 바 있다. 이날 연주는 임윤찬의 스승인 손민수가 등장하기 때문에 더 관심을 끌었지만, 정작 손민수는 그만큼 큰 부담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손민수는 매우 성실하고 진지한 음악가라는 느낌을 주었다. 그의 탄탄한 품이 있었기에 임윤찬의 재능이 흔들림 없이 피어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올가을부터 미국 보스톤의 뉴잉글랜드 콘서바토리에서 교편을 잡게 되는 피아니스트 손민수는 임윤찬의 스승이기에 앞서 한명의 음악가다. 그의 앞날에 응원을 보낸다. 

이날 연주의 핵심은 역시 말러 교향곡 1번 <거인>이었다. 광주시향은 교향악축제에서 연이어 쇼스타코비치 교향곡(2021년은 5번, 2022년은 11번)을 선보여 호평을 받은 바 있는데, 올해는 분위기를 일신하여 말러에 도전했다. 

교향곡 1번 <거인>은 말러가 28살 때인 1888년 완성하고 이듬해 직접 지휘하여 초연한 작품으로, 젊은 말러의 고뇌와 방황, 극복의 여정을 담고 있다. 한 젊은이가 시련 끝에 성장을 이루는 장 파울의 소설 <거인>은 말러 자신의 이야기였다. 이 교향곡은 1885년 작곡한 연가곡 <방황하는 젊은이의 노래>에 뿌리를 두고 있다. 1악장의 주제는 연가곡의 제2곡 ‘오늘 아침 들판을 걸었네’에서 따 왔는데, 제1곡 ‘내 연인이 결혼했을 때’를 생략한 것으로 본다면 실연의 아픔이 교향곡의 저변에 깔려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3악장 장송행진곡의 후반부에도 연가곡의 제4곡 ‘내 연인의 푸른 두 눈동자’의 주제가 등장한다. 젊은이가 슈베르트의 <보리수>처럼 절망 속에서 사랑과 고통을 회상하며 이룰 수 없는 꿈을 노래한다. 폭풍처럼 격렬한 피날레에도 원래 ‘상처입은 마음의 울부짖음’이란 부제가 붙어 있었다. 이렇게 보면, 찬란한 승리와 삶의 긍정을 노래하는 이 피날레는 말러 자신의 젊은 날에 대한 오마주라고 할 수 있다. 

▲2023년교향악축제의 첫 무대인 광주시향(지휘자 홍석원)이 연주 후 관객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다.
▲2023년교향악축제의 첫 무대인 광주시향(지휘자 홍석원)이 연주 후 관객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다.

홍석원과 광주시향은 혼신의 힘을 다한 연주로 청중들을 감동시켰다. 현악 파트의 음량과 질감은 훌륭한 수준이었고, 1악장 하프, 큰북, 트라이앵글 등은 여리게 연주할 때도 선명히 들리면서 다른 악기들과 밸런스가 잘 맞아서 만족스러웠다. 2악장은 랜틀러 풍의 춤곡인데, 지휘자가 섬세한 템포 변화를 요구할 때마다 오케스트라는 정확히 호응하여 훌륭한 앙상블을 들려주었다. 3악장, ‘아유 슬리핑, 브라더 존’ 선율을 그로테스크하게 변형시킨 콘트라바스의 솔로에 청중들은 집중했고, 유태 사회의 캬바레처럼 혼돈스런 대목도 단정하게 잘 표현했다. 피날레 ‘폭풍처럼 움직여서’(stürmisch bewegt)에서 불을 뿜는 금관과 열정적인 현악의 절규는 청중들을 압도했다. 1악장과 4악장 마무리에서 홍석원은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과감한 악셀레란도(accelerando)를 시도했는데, 오케스트라는 이를 훌륭히 소화해서 청중들에게 엑스터시를 안겨 주었다. 

물론 몇 가지 아쉬움은 있었다. 1악장 도입부, 무대 밖 트럼펫 소리의 음량이 작아서 안타까웠다. 관악 파트, 특히 호른 파트는 완벽한 호흡을 위해 좀 더 노력할 소지가 있지 않았을까 싶었다. 유뷰브 생중계로 음악을 들은 말러 팬들 사이에서 ‘사운드의 세련미가 아쉽다’, ‘관악 파트가 불안하다’는 볼멘소리가 나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유튜브의 한계이며, 라이브로 들은 감동은 대단했다”는 반론도 있었다. 말러 교향곡에서 ‘완벽의 경지’란 게 존재할까? 말러 교향곡은 이번 교향악축제의 캐치프레이즈처럼 언제나 ‘무한도전’(Infinite Challenge)이 아닐까? 
  
지휘자 홍석원과 광주시향은 서로 신뢰하며 최선을 다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홍석원은 오케스트라의 모든 파트를 존중하고 격려하는 따뜻한 리더십을 발휘했다. 악장 이종만과 제1바이올린 수석 박신영은 음악이 물결칠 때 매우 음악적인 연주 동작으로 눈길을 끌었다. 두 사람은 홍석원의 지휘를 민감하게 따르면서도 수동적인 연주에 머물지 않고 솔로이스트처럼 적극적으로 연주하며 현악 파트를 멋지게 리드했다. 지휘자 홍석원과 광주시향의 음악가들은 오케스트라와 지휘자가 마음으로 하나되는 이상적인 모습으로 감동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