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동부 도네츠크 리만 탈환한 우크라이나 군인[로이터=연합뉴스 자료 사진]
우크라이나 동부 도네츠크 리만 탈환한 우크라이나 군인[로이터=연합뉴스 자료 사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달 30일(이하 현지시간) 우크라이나 4개 지역에 대한 합병 선언을 한 지 하루 만에 우크라이나군이 동부 도네츠크주 리만을 되찾았다.

리만은 러시아군의 핵심 병참기지 역할을 한 전략 요충지다.

그러나 정작 리만 주민들은 합병 사실조차 몰랐다고 연합뉴스가 뉴욕타임스(NYT, 2일자)를 인용해 보도했다. 

NYT는 인터뷰에 응한 리만 주민 6명이 인터넷, 전기, 라디오가 차단돼 리만이 한때나마 러시아에 편입됐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고 전했다.

우크라이나 병참 핵심기지 리만[ISW 제공]
우크라이나 병참 핵심기지 리만[ISW 제공]

자신의 아파트 마당에서 모닥불을 피워 주전자에 물을 끓이던 올레나 하리코우스카는 지난달 30일 푸틴 대통령이 리만을 러시아의 일부로 선언했다는 NYT 기자의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러시아의 침공이 시작되기 전에 주민 약 2만2000 명이 살았던 리만에서는 올해 5월 러시아가 리만을 점령한 뒤 수개월째 가스 공급이 끊겨 이처럼 모닥불을 피우는 주민이 많다.

하리코우스카는 "아무런 소식도 듣지 못했다"면서 "이 소식을 들으니 '그들은 나 없이 나와 결혼했다'라는 속담을 떠올라 재미있다"고 말했다.

리만 곳곳에는 러시아군이 급하게 퇴각한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거리에는 러시아 군용차량이 불에 탄 채 방치돼 있는가 하면, 도시 외곽에는 러시아군 시신이 그대로 버려져 있었다.

우크라이나 군인이 리만 기념비에 걸린 친러 도네츠크공화국 깃발을 버리는 모습[로이터=연합뉴스 자료 사진]
우크라이나 군인이 리만 기념비에 걸린 친러 도네츠크공화국 깃발을 버리는 모습[로이터=연합뉴스 자료 사진]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리만 주요 광장에는 러시아 상점에서 구호품을 확보해 나르는 주민 행렬이 이어졌다. 이날 이른 아침에 주민 수십 명은 러시아 상점문을 열고 들어가 밀가루 포대를 가지고 나왔다.

드미트로 혼타르는 "우리는 여전히 뭐가 뭔지 알 수 없다"며 "길거리에 있는 군인은 러시아군인가 우크라이나군인가"라고 반문했다.

혼타르는 "사람들은 그저 모든 것을 약탈하고 있을 뿐"이라면서 고개를 가로젓더니 이내 행렬에 동참했다.

5㎏짜리 밀가루 포대를 끌고 가던 타마라 코자첸코는 "우리는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했다"면서 "전쟁 전에 모아둔 식량이 있다면 닥치는대로 먹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러시아군이 어떻게 사라졌는지 보지도 못했다"며 "이게 끝인가"라고 되물었다.

러시아가 점령한 핵심 병참기지 리만을 하루 만에 탈환한 후 악수를 나누는 우크라이나군[게티이미지]
러시아가 점령한 핵심 병참기지 리만을 하루 만에 탈환한 후 악수를 나누는 우크라이나군[게티이미지]

주민들은 우크라이나군의 탈환 소식에서 희망을 보이기도 했다.

전쟁 전에 리만 기차역에서 일했다는 로만 초르노모레츠는 우크라이나군의 승리 소식에 기뻐하며 "리만에는 불행과 어둠이 가득했고, 포격이 끝없이 이어졌다. 가스나 전기도 공급되지 않았다"며 "이제라도 상황이 나아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우크라이나 군인이 리만 기념비에 걸린 친러 도네츠크공화국 깃발을 버리는 모습[로이터=연합뉴스 자료 사진]
우크라이나 군인이 리만 기념비에 걸린 친러 도네츠크공화국 깃발을 버리는 모습[로이터=연합뉴스 자료 사진]

러시아가 또다시 리만을 점령할 수 있다는 우려 섞인 목소리도 나왔다.

익명 보도를 요구한 한 주민은 2014년에 이어 올해까지 벌써 4번째 리만의 '주인'이 바뀌었다면서, 러시아가 리만을 다시 공격하겠다고 선언했다며 러시아의 재점령을 걱정했다.

그는 "리만 주민들은 전쟁이 완전히 끝나야 기뻐할 수 있을 것"이라면서 "이렇게 왔다 갔다 하는 것은 우리를 너무 힘들게 한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평화"라고 말했다.

2일 오전 우크라이나 공수부대 병력 일부는 리만 시의회 건물에서 러시아 국기를 내리고 지난달 23일부터 닷새간 치러진 러시아 합병 선거에 사용된 선거 광고물을 모아 불태웠다. 선거 광고물에는 '러시아와 돈바스 영원히'라고 적혀있었다.

리만에서 퇴각하다 목숨을 잃은 러시아군 병사들의 시체가 늘려 있다[WSJ 캡처]
리만에서 퇴각하다 목숨을 잃은 러시아군 병사들의 시체가 늘려 있다[WSJ 캡처]

이 모습을 본 한 주민은 방금 고향에 돌아왔다는 한 우크라이나 경찰에게 다가가 여기에 얼마나 오래 있을 것이냐고 물었고, 경찰은 "영원히"라고 답했다.

경찰은 "드디어 집에 왔다"면서 "지난 6개월간 집에 돌아오지 못했다. 너무 길었다"고 말했다.

한편 리만을 잃고 퇴각한 러시아군에 대해 러시아 국내에서도 비난 여론이 비등하다고 외신들이 2일 보도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30일(현지시간) "러시아에 새로운 4개 지역이 생겼다"며 우크라이나 내 점령지의 합병을 선언하고 관련 조약에 서명했다. 푸틴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내 점령지 수장들과 합병을 축하하고 있다[EPA=연합뉴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30일(현지시간) "러시아에 새로운 4개 지역이 생겼다"며 우크라이나 내 점령지의 합병을 선언하고 관련 조약에 서명했다. 푸틴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내 점령지 수장들과 합병을 축하하고 있다[EPA=연합뉴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국민 앞에서 우크라이나 점령지 병합을 선언한 지 하루 만에 핵심 요충지인 도네츠크 리만에서 힘없이 밀려난 굴욕적인 모습을 보인 것이라 내부에서도 적잖은 충격을 받은 모양새다.

워싱턴포스트(WP)는 러시아군이 리만에서 퇴각해 새로운 방어 전선을 구축 중인 가운데 친정부 성향 텔레그램 채널에서는 군 지휘부의 무능을 질타하는 목소리가 높다고 보도했다.

러시아군 패잔병 수색작전을 하는 우크라이나군[WSJ 캡처]
러시아군 패잔병 수색작전을 하는 우크라이나군[WSJ 캡처]

포문을 연 것은 우크라이나 전쟁에 참전 중인 람잔 카디로프 체첸 자치공화국 정부 수장 람잔 카디로프다.

그는 "전장에는 용감하고 규율을 지키고 병사들을 위해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지휘관이 배치돼야 한다. 군에서 족벌주의가 설 땅은 없다. 특히 지금같이 어려운 시기는 더욱 그렇다"라고 말했다.

이에 러시아 신흥재벌로서 용병집단 '와그너'의 설립자이기도 한 예브게니 프리고진도 거들었다.

그는 와그너 관련 텔레그램에서 "카디로프의 표현은 전적으로 내 스타일은 아니다"라면서도 "하지만 나는 이 XX들을 발가벗겨서 기관총을 들려 최전방에 세우고 싶은 마음"이라고 적으며 군 지휘부를 원색적으로 비난했다.

2011년 11월 크렘린 만찬에서 푸틴에게 음식을 소개하는 예브게니 프로고진(왼쪽)[로이터 통신]
2011년 11월 크렘린 만찬에서 푸틴에게 음식을 소개하는 예브게니 프로고진(왼쪽)[로이터 통신]

친 크렘린 성향 싱크탱크인 '러스트라트'의 엘레나 파니나 국장은 이같은 러시아 군 지휘부에 대한 공개적인 공격은 전례가 없는 일이라면서도, 그 자신도 군 지휘부의 물갈이가 필요하는 취지로 언급했다.

 

러시아군이 구호품 지급을 위해 중심가에 설치한 장소에 다시 모여든 리만 주민들[WSJ 캡처]
러시아군이 구호품 지급을 위해 중심가에 설치한 장소에 다시 모여든 리만 주민들[WSJ 캡처]

한 친정부 텔레그램 뉴스채널은 이같은 공개 비난에 대해 "배신보다 더 나쁘다"고 평가하고 군에 대한 공격을 자제할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이와 함께 NYT에 따르면 러시아의 한 신문은 리만 철수 당시 상황을 매우 사실적인 논조로 전해 눈길을 끈다

러시아 일간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의 종군 기자는 리만 퇴각 소식을 보도하는 2일자 기사에서 "사기가 떨어진 병사들이 퀭한 눈(empty eyes)을 한 채 겨우 리만을 빠져나갔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