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버린 넋

 

이 땅에 내려서 
고요히 묻혀 살고 싶었다

불의 세례를 받을 운명은 
한마디 변명도 못하고  
낯선 이름표를 가슴에 달았다
정처 없이 발길 내려 이 한 몸 불사르며 
허기에 여념 없었다

빨갛게 익어 터지는 몸으로
불타는 뜨거움을 해산할 때
야비한 좀비들은 흥청망청 
영혼 없는 춤을 질탕 추었다

불꽃을 안고 살아온 한 세월 
찌그러진 체구에 주름만 살아
입마저 다물 수 없는 괴물이 되었다

쓸쓸히 버려진 처량한 신세
담장 한 구석 찢어진 김치독에 기대어
웅크리고 꾸벅꾸벅 졸고 있다

타버린 심장 하나 울고 있다

 

본연
 
날 때부터 벙어리인 나무들
춘하추동 오직
나이테로 속살을 수놓는
무언의 고백
 
물려받은 색깔로 투정 없이
자태를 뽐내는
들녘의 야생화는 곁눈질 없이
세상을 향해 순정을 펼친다
 
목마름의 아픔으로
사막을 스케치하는 선인장
진흙 속에 탯줄 묻고
순결을 그리는 연꽃
앉으나 서나 태양을 따르는
해바라기의 갸륵한 심성
 
외로움 지우며 웃고 선
길섶의 강아지풀
고독을 둘러멘
정처 없이 보금자리 더듬는
자유의 영혼 민들레 홀씨
 
한순간도 멈춤 없이
둥지를 향해 달리는 강물
피곤기 가신 채 해님은 
오늘도 서산마루에 걸터 앉았다


하루살이
 

살자고 하는 노릇인데
왜 그렇게 미친 듯 버둥댈까
그러게 
지 죽을 줄 모르고
밥 먹고 살면 되는 거지
 
살기 위해 먹었던지
먹기 위해 살았던지
어렴풋한 누군가의 이야기
 
몽롱한 구름 속으로
반달이 헤엄친다
아니 구름이 달을 어루만진다
 
딱 하루 살고 떠나간
과부의 유언장은 백지였다

권명호 시인 
권명호 시인 


 
눈을 떴지만 캄캄하고
숨을 쉬지만 답답하다
 
귀가 있지만 들리지 않고
걷고 있지만 움직이지 않다
 
옷을 껴입었지만 춥기만 하고
봄인데 꽃이 없다
 
여름인데 푸른 숲이 보이지 않고
가을인데 단풍빛이 없다
 
겨울인데 눈 한 점 없이 삭막하고
사랑을 먹고 있는데 가슴이 차갑다 


혹시 내가 꿈을 꾸고 있을까

 

그냥
 
오늘이면 돌아올까
내일이면 볼 수 있을까
문득 그리워지는
집나간 하늘의 그 얼굴
 
보고픔에 허기져 허둥대지만
가출한 하늘은
허울만 벗어놓은 채
꿩 구워먹은 자리다
 
얼굴 없는하늘에
푸른 잎은 숨을 죽이고
가녀린 진달래는
글썽이며 울음 삼킨다
 
목 마르면 물이 그립고
가슴 아프면 술이 고프다
쿡쿡 그리움 쑤셔오면
까만 밤이 하얗게 타버린다
 
그리움의 등불 밝히면
어두운 밤길도 헤칠 수 있거늘
가을 전어라도 구워볼까
집나간 하늘이 돌아올지
 
잔인한 기쁨도 생각 없고
무지개빛 고독도 꿈꾸지 않는다
그대로의 하늘이 그리울 뿐이다
그냥


 
삶2

 

약속도 없이 울면서 
세상을 마주한 유희
이정표 알 수 없는 생의 길에
우두커니 서서 두리번거린다
껴입고 채우며 아득아득
세월과 씨름하는 일상들
때론 간신히 웃음도 흘렸지만
그보다는 아픔으로 
허한 가슴 두드릴 때가 더 많았다
꼭꼭 씹은 밥알들이
잘근잘근 씹은 고기들이
순리대로 조용히 유영할 때
알 수 없는 생로병사의  절벽 앞에
무참히 주저앉는 여행자
산다는 것은 웃다가도 우는 연기다

 

산다는 것은
 
기를 쓰며 어둠 찢고 
솟아오른 해님
겨우 그 짧은 시간 유영하고
다시 서산 너머로 사라지는 모습
 
근근이 하루를 살기 위해
세상에 얼굴 내밀었다 
소실되는 하루살이
 
봄날의 햇빛 껴입고 
여름날의 푸름으로 단장하고
가을의 빛깔로 옷을 벗으며
드디어 겨울의 아픔으로
자신을 비우는 나무의 모습
 
신다는 것은 
입었던 옷을 벗고
다시 벌거숭이로 된다는 것

 

일상 야곡

 

보여도 보이지 않는다  
잡아도 잡을 수가 없다  
옷깃을 스쳐도 못 본 척하고 
서로를 무시하며 어두움을 만끽한다    
 
찬물에 밥 말아 후루룩 넘기는 시간  
열대야에 통닭이 구워지고  
마른하늘 날벼락에 해가 찔려  
보름달마저 불구름을 토해낸다 
 
가는 이 없고 올 이 없는 
적막강산에 홀로 앉아 
잔 들어 허공에 부으니 
이 한 가슴 애간장이 녹는다        
 
고향은 지척인데 멀어만 가고 
손 내밀면 닿을 듯해도 닿지 않는 님 
입 막고 백수로 돌아온 나그네  
덫에 걸려 인고하는 가슴앓이여   
 
향수에 취해 찾아간 정든 산천 
아내와 도랑물에 저린 발 담그고 
밤하늘에 흐르는 별을 헤며 
개구리 울음소리에 이 마음 적시고 싶다   
 
이제라도 구슬땀 흠뻑 젖도록
통장에 낟알 쌓이는 소리 들으면 
정든 타향 구로동 자취방에도 
콧님의 웃음소리 달콤해지련만  
 
이 밤도 서울 버전 
일상 야곡은 흐른다 

 

서울의 눈

 

종로3가의 어느 골목길
눈발 속에 비쳐오는 그림자
비틀거리는 걸음걸이
코끝이 시리게
흰 눈은 엄한을 품었다
생활비 걱정하는 반지하에
괘씸하게 찬바람이 기어든다
얼음장이 된 방바닥에
널부러져 있는 때 입은 이부자리
창턱에 옹송그리고 앉은 길고양이
간신히 두 눈 껌뻑이며 
집안을 기웃거린다
눈발이 더 굵어지며 
서울 하늘은 재빛으로 짙어간다

 

 어항 속 작은 물고기

 

푸른 바다도 아니고
출렁대는 강물도 아닌
어쩌면 제한된 작은 울타리
그래도 신이 난 그 모습

고향이 어딘지 
타관땅이 뭔지
부모가 누군지도 모른다
오로지 숨 쉴 수 있는 
작은 둥지만을 애착할 뿐

저녁 늦게 퇴근하는 사람들
바쁜 걸음으로 너도 나도
저마다의 둥지로 향한다

시조

 

년年

나이테 돌고 돌아 겹겹이 쌓여가고 
세월에 얼기설기 엮어진 연륜 속에
사라진 풍진 세월에 인고의 삶 고였네

 

하루살이 

가리봉 언덕 길에 새벽녘 선잠 털며
모여든 인생살이 날마다 점치듯이 
소박한 바램 짝지어 가는 일터 어디냐 

 

아픔

조상의 뼈와 살로 태어난 맨손 맨몸
뼛속에 깊이 맺힌 이산의 아픔 저려 
육친의 끊어진 한은 애처로이 맴돈다 

 

가네

맨 낯에 젖어 내린 눈물은 흔적 없고
이별의 어깨너머 한가슴 저며온다
찢어진 초라한 연정 부푼 마음 접는다

 

포차

어둠에 등불 걸고 길손들 불러오고 
인고의 허기진 배 뜨겁게 채워준다 
모진 삶 가슴에 녹여 인생의 강 건넌다

 

가신 님

이별이 애통하여 피 맺은 가지마다
묻고 간 꽃잎 갈피 봄빛이 어루만져
님의 정 담아 풍만한 가슴 속에 잠든다

 

야밤

슬픔을 잊으라고 야밤은 고요한데
창천에 둥근 달은 뭘하려 어둠 밝혀
야삼경 오욕칠정에 찌든 인생 저문다

 

진달래

이른 봄 모진 고초 시린 몸 허리 펴고 
찬이슬 목 축여서 움트는 꽃망울이 
새봄이 오는 길목에 서서 활짝 웃는다 

산하의 초목들이 푸르러 물드는데 
천지에 연분홍빛 봄빛에 더욱 곱다 
진달래 수줍은 얼굴 낯붉히며 웃는다 

 

갈치

촉각을 잃어버린 날카론 은빛 검도 
찌르고 내리치며 칼 끝에 걸린 목숨 
물결에 시퍼런 검을 갈고 있는 은갈치

 

고등어

소금을 등에 지고 철판에 지글지글
뒤집어 소금 한짐 묵직이 끌어 안고
숯불의 적의로 굽혀 가는 길을 살핀다

 


흐르는 가야하 물 되돌릴 수 없듯이
살아진 아픈 사연 후회한들 무엇해
덧없는 세월이건만 악착같이 살련다

 

나그네 
세월에 떠밀려서 달리는 인생 미로
구만리 머나먼길 돌고돌아 황혼마루
향수에 심금을 울린 노을타는 나그네

 

팔자
물결이 핥고 깍은 강가에 고독 낚아 
잘난 놈 팔자 펴고 천한 놈 바닥 깔아 
세월을 줍던 시인은 지평선에 저무네 


가신 님
이별이 애통하여 피 맺은 가지마다
묻고 간 꽃잎 갈피 봄빛이 어루만져
님의 정 담아 풍만한 가슴 속에 잠든다

 

비빔밥 

가슴에 묻어 놓은 어머니 손길 따라 
메나리 보리밥에 고추장 쓱쓱 비벼 
한술에 부른 뱃심이 고향으로 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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