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리 본사 전경 [사진=Momoneymoproblemz, CC BY-SA 4.0, via Wikimedia Commons][헬스코리아뉴스 / 임해리] 비만·당뇨병 치료제 시장에서 막대한 성장동력을 확보한 일라이 릴리(Eli Lilly)가 정신질환 치료제 영역으로 보폭을 넓힌다. 치료저항성 우울증 신약후보물질을 개발 중인 미국 바이오기업 아타이벡클리(AtaiBeckley)를 최대 38억 달러(7월 17일 한화 기준 한화 약 5조 6327억 4000만 원)에 인수하기로 했다.
이번 거래는 릴리가 기존 항우울제와 다른 기전의 후기 임상 자산을 확보해 정신질환 치료제 시장에 본격 진입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특히 환각성 물질을 활용한 치료제가 초기 연구 단계를 넘어 글로벌 빅파마의 주요 투자 대상으로 부상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로 평가된다.
릴리와 아타이벡클리는 현지시간 16일 릴리가 아타이벡클리의 발행주식 전량을 인수하는 최종 계약을 체결했다고 밝혔다.
릴리는 거래 종결 시 아타이벡클리 주식 1주당 6.75달러를 현금으로 지급한다. 거래 종결 시 지급되는 현금 대가 기준 지분가치는 약 28억 달러다. 여기에 핵심 파이프라인의 임상개발과 허가 성과에 따라 주당 최대 2.50달러를 추가 지급하는 조건부가치권리(CVR)가 포함돼 전체 거래 규모는 최대 약 38억 달러에 이를 수 있다.
거래 종결 시 지급되는 가격은 지난 15일까지 30일간 아타이벡클리 주식의 거래량가중평균가격보다 약 40% 높은 수준이다. 양사 이사회는 이번 거래를 승인했으며, 아타이벡클리 주주와 규제당국의 승인을 거쳐 올해 3분기 거래를 마무리할 예정이다.
아페이론 인베스트먼트 그룹(Apeiron Investment Group)과 아타이벡클리의 이사·임원진도 거래 승인에 찬성하는 의결권 행사 및 지지 계약을 체결했다. 이들이 보유한 주식은 전체 발행주식의 약 15%에 해당한다.
비강분무형 5-MeO-DMT 'BPL-003'이 핵심
릴리가 이번 인수를 통해 확보하는 핵심 자산은 치료저항성 우울증 치료제로 개발 중인 'BPL-003(성분명: 메부포테닌 벤조에이트·mebufotenin benzoate)'이다.
'BPL-003'은 환각성 물질인 5-MeO-DMT(5-메톡시-N,N-디메틸트립타민)를 합성한 비강분무형 제제다. 의료기관에서 코를 통해 투여하는 방식으로 개발되고 있다.
아타이벡클리는 치료저항성 우울증과 중증 정신질환이 기분 조절에 관여하는 뇌 영역의 시냅스 가소성 저하와 관련이 있을 수 있다는 연구 결과에 주목하고 있다. 시냅스 가소성은 뇌가 새로운 신경 연결을 형성하고 기존 연결을 강화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회사는 'BPL-003'이 손상된 시냅스 연결을 회복하고 새로운 신경 연결의 성장을 촉진하도록 설계됐다고 설명했다. 신경전달물질의 농도를 주로 조절하는 기존 항우울제와는 다른 접근법이다.
치료저항성 우울증은 여러 치료를 받았음에도 우울 증상이 충분히 개선되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미국에서만 수백만 명이 치료저항성 우울증을 앓는 것으로 추정되지만, 기존 치료에 반응하지 않는 환자를 위한 선택지는 여전히 제한적이다.
'BPL-003'은 임상 2b상에서 평균 약 2시간 동안 진행된 한 차례의 의료기관 방문과 투여 이후 우울 증상을 빠르고 지속적으로 감소시켰다. 회사 측에 따르면 치료 효과는 수개월간 이어졌다.
미국 식품의약국(FDA)은 'BPL-003'을 혁신치료제(Breakthrough Therapy)로 지정했다. 아타이벡클리는 현재 임상 3상 활동을 시작한 상태다.
다만 회사는 임상 2b상의 구체적인 환자 수와 우울 증상 감소 폭, 위약군 대비 통계적 유의성 등을 이번 인수 발표문에 공개하지 않았다. 임상 3상에서 효과의 재현성과 환각 반응을 비롯한 안전성, 의료기관 내 투여·관찰 부담을 입증하는 것이 향후 허가와 상용화의 관건이 될 전망이다.
DMT 필름·R-MDMA 후보물질까지 확보
릴리는 'BPL-003'과 함께 아타이벡클리가 개발 중인 치료저항성 우울증 후보물질 'VLS-01'과 사회불안장애 후보물질 'EMP-01'도 확보한다.
'VLS-01'은 환각성 물질인 DMT(N,N-디메틸트립타민)를 볼 안쪽 점막을 통해 흡수시키는 구강점막 필름형 제제다. 현재 치료저항성 우울증 환자를 대상으로 임상 2b상이 진행 중이다.
'EMP-01'은 R-MDMA 염산염을 활용한 사회불안장애 치료 후보물질로 임상 2상 단계에 있다. 아타이벡클리는 이와 함께 환각 작용을 최소화하면서 신경가소성을 높이는 비환각성 5-HT2A 수용체 작용제 발굴 프로그램도 진행하고 있다.
CVR 지급 조건은 이들 파이프라인의 개발 성과와 연계돼 있다. 거래 종결 후 4년 안에 'VLS-01'의 임상 3상이 시작되면 주당 1달러가 추가 지급된다.
'BPL-003'이 거래 종결 후 5년 안에 미국 허가를 받고 미국 마약단속국(DEA)의 규제등급 재분류를 완료하면 주당 0.50달러가 지급된다. 'VLS-01'이 7년 안에 같은 조건을 충족하면 주당 1달러가 추가된다.
릴리는 아직 허가받지 않은 임상 단계 자산에 28억 달러의 현금 대가를 책정하고, 최대 10억 달러의 추가 대금은 임상·허가 성과에 연동했다. 후기 임상 파이프라인의 잠재력은 높게 평가하되 개발 실패와 규제 불확실성은 분산하려는 거래 구조로 풀이된다.
환각성 물질 기반 치료제, 빅파마 경쟁 무대로
이번 인수는 릴리가 비만과 당뇨병 치료제에 집중된 성장구조를 신경과학 분야로 확장하려는 전략의 연장선에 있다.
릴리는 알츠하이머병을 비롯한 신경퇴행성 질환 치료제 개발에 투자를 확대해왔다. 아타이벡클리 인수로 기존 치료에 반응하지 않는 우울증과 사회불안장애 등 정신질환까지 신경과학 사업 영역을 넓힐 수 있게 됐다.
특히 초기 연구가 아니라 FDA 혁신치료제 지정을 받고 임상 3상 활동을 시작한 'BPL-003'을 확보했다는 점이 주목된다. 릴리는 자체 개발보다 빠르게 후기 임상 자산과 관련 연구개발 역량을 확보해 정신질환 치료제 시장 진입에 필요한 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
이번 거래는 환각성 물질 기반 치료제의 산업적 위상이 달라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관련 후보물질은 과거 환각 작용과 마약류 규제 때문에 상업화 가능성에 대한 의구심이 컸으나, 최근에는 빠른 치료 효과와 장기간 지속 가능성을 앞세워 치료저항성 정신질환의 새로운 대안으로 주목받고 있다.
반면 넘어야 할 장벽도 적지 않다. 일반적인 경구용 항우울제와 달리 의료기관에서 약물을 투여하고 환자를 관찰해야 하는 만큼 별도의 치료 인프라와 전문 인력이 필요하다. 미국에서 허가받더라도 DEA의 규제등급 재분류 등 상업화에 필요한 추가 규제 절차를 거쳐야 한다.
그럼에도 릴리가 최대 38억 달러를 투입하기로 한 것은 정신질환 치료의 무게중심이 매일 복용하는 약물에서 의료기관 기반의 신속·지속형 중재 치료로 확장될 가능성을 높게 평가한 결과로 풀이된다.
이번 거래가 예정대로 마무리되면 글로벌 정신질환 치료제 경쟁은 기존 신경전달물질 조절 약물을 넘어 비강분무제와 구강점막 필름 등 신경가소성 회복을 겨냥한 새로운 치료 플랫폼을 중심으로 한층 치열해질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