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ASCO 연례학술대회가 열린 미국 시카고 매코믹 플레이스(McCormick Place) 전경. 이번 대회는 범RAS 표적항암제의 가능성을 확인한 자리였다. (사진=미국임상종양학회)[헬스코리아뉴스 / 서정필] KRAS G12D 변이를 직접 겨냥하는 표적항암제에 대한 기대가 커지는 가운데, 아예 RAS 신호체계 전반을 공략하는 범(汎)RAS 전략이 업계와 의료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지난 4월 미국 샌디에이고에서 열린 미국암연구학회 2026 연례학술대회(AACR 2026)는 'KRAS G12D'를 차세대 표적항암제 경쟁의 중심으로 부각시킨 자리였다. 그로부터 한 달여 뒤, 미국 시카고에서 열린 미국임상종양학회 2026 연례학술대회(ASCO 2026)는 한 단계 더 나아간 모습을 보여줬다. 특정 돌연변이 하나를 공략하는 수준을 넘어 RAS 신호체계 전반을 겨냥하는 범(汎)RAS 억제제의 긍정적인 임상 결과가 공개된 것이다.
RAS는 암세포 성장과 증식을 조절하는 핵심 단백질군이다. KRAS·NRAS·HRAS가 여기에 속한다. RAS 변이는 전체 암의 약 25%에서 발견된다. 암종별로는 췌장암의 최대 90%, 대장암 약 50%, 비소세포폐암 약 30%에서 검출된다. 세 암종 모두 사망률이 높고 치료 선택지가 제한적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이 가운데 KRAS가 전체 RAS 변이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NRAS는 흑색종과 갑상선암, HRAS는 방광암과 두경부암에서 상대적으로 자주 발견된다.
문제는 RAS가 오랫동안 '약물치료불가영역(undruggable)'으로 불려왔다는 점이다. 약물이 결합할 수 있는 뚜렷한 공간이 없어 표적치료제를 설계하기가 극히 어렵기 때문이다. 치료 공백이 가장 큰 암종들의 핵심 원인이 RAS라는 것을 알지만, 구조적 한계 때문에 정작 이를 겨냥할 무기가 없었던 것이다.
'약물치료 불가'에서 표적치료 핵심 전장으로
전환점은 KRAS G12C 억제제 개발이었다. FDA는 '루마크라스(Lumakras, 성분명 : 소토라십·sotorasib)'와 '크라자티(Krazati, 성분명 : 아다그라십·adagrasib)'를 잇따라 승인하며 KRAS 표적치료 시대를 열었다. 약물이 비집고 들어갈 틈조차 없다던 KRAS를 직접 억제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후 시장의 관심은 KRAS G12D로 이동했다. G12D는 췌장암·대장암에서 빈번하게 발견되는 변이다. 특히 췌장암 환자의 상당수에서 검출돼 차세대 표적항암제 시장의 핵심 전장으로 꼽혀 왔다.
AACR 2026에서는 레볼루션 메디신(Revolution Medicines)의 '졸돈라시브(zoldonrasib·RMC-9805)'가 대표 사례로 주목받았다. '졸돈라시브'는 KRAS G12D를 선택적으로 억제하는 후보물질이다. 브리스톨마이어스스퀴브(BMS)의 'MRTX1133'도 같은 표적을 겨냥한 후보물질로 거론됐다.
AACR 2026이 "G12D도 직접 뚫을 수 있느냐"를 확인하는 무대였다면, ASCO 2026은 그다음 질문을 던진 자리였다.
췌장암서 확인된 범RAS 전략의 가능성
ASCO 2026의 주인공은 '졸돈라시브'를 개발한 레볼루션 메디신의 또 다른 개발 약물 '다락손라십(daraxonrasib·RMC-6236)'이었다. '다락손라십'은 특정 KRAS 변이 하나만 겨냥하지 않는다. 여러 RAS 변이를 폭넓게 억제하도록 설계된 RAS(ON) 억제제다.
이번 학회에서 공개된 전이성 췌장암 임상 3상 결과는 범RAS 표적항암제가 현실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받는다.
이미 1차 치료를 받은 전이성 췌장암 환자 500여 명을 대상으로 진행된 연구에서 '다락손라십'은 기존 화학항암요법 대비 전체생존기간(OS), 무진행생존기간(PFS), 객관적반응률(ORR) 등 주요 지표 전반에서 개선 효과를 나타냈다.
'다락손라십'과 기존 화학항암요법을 비교한 결과, 전체생존기간(OS) 중앙값은 각각 13.2개월 대 6.7개월로 나타났다. '다락손라십'은 사망위험에서도 항암화학요법 대비 60% 낮았다(HR 0.40, p<0.0001).
'다락손라십'은 무진행생존기간(PFS)·객관적반응률(ORR)·삶의 질(QOL) 등 모든 1차·핵심 2차 평가변수를 충족했다. 3등급 이상 이상반응 발생률도 '다락손라십'군 43.6%로 화학요법군 57.5%보다 낮았다.
무엇보다 '다락손라십'은 RAS 변이 종류와 무관하게 효과가 확인됐다. 이는 치료 선택지가 극히 제한적인 췌장암에서 RAS 변이 전반을 겨냥해 실제로 생존기간을 늘릴 수 있다는 근거가 나온 것이다.
에라스카(Erasca)는 'ERAS-0015'를 앞세워 경쟁에 뛰어들었다. 'ERAS-0015'는 RAS 단백질에 달라붙어 신호를 차단하는 분자접착제(molecular glue) 계열 범RAS 억제제다.
이 약물은 1상 임상(AURORAS-1)에서 KRAS G12X 변이 비소세포폐암 환자의 반응률이 최대 75%, 췌장암에서 50%로 나타났다. 전임상에서는 '다락손라십'보다 RAS 억제 효능이 약 5배 강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밖에 암젠(Amgen) 역시 'AMG 410'을 통해 여러 KRAS 변이를 동시에 겨냥하는 전략을 추진 중이다.
새로운 표적항암제 개발 속도는 갈수록 빨라지고 있다. G12C 억제제가 처음 승인된 시점은 2021년이다. 이후 불과 수년 만에 G12D 표적 후보물질이 부상했고, 다시 범RAS 전략이 임상 3상 데이터 단계에 진입했다. 한 세대의 표적이 다음 세대로 교체되는 주기가 점점 짧아지고 있는 셈이다.
아직 승인까지는 추가 검증과 규제 절차가 남아 있다. 하지만 이번 3상 결과는 오랫동안 '약물치료 불가'로 여겨졌던 RAS 신호체계가 실제 임상 현장에서 공략 가능한 치료 표적으로 바뀌고 있음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치료 선택지가 부족했던 췌장암·대장암·폐암 등 난치성 고형암에서 범RAS 억제제가 새로운 치료 축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을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