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존의 고지혈증 치료제가 암세포의 방어막을 무너뜨리고 전이를 억제할 핵심 열쇠로 주목받고 있다. (사진은 인제대학교 일산백병원 의료진의 진료 장면으로 본 기사와 무관함)[헬스코리아뉴스 / 이충만] 대장암, 췌장암, 난소암 등 이른바 난치암 환자의 고통인 복수가 단순한 증상을 넘어 암세포의 전이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 새롭게 밝혀졌다. 특히 기존의 고지혈증 치료제가 암세포의 방어막을 무너뜨려 복막 전이를 억제할 수 있다는 사실도 함께 규명됐다.
췌장암, 난소암, 대장암은 현대 의학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완치가 어려운 난치성 암으로 분류된다. 이들 암의 가장 큰 문제는 초기 증상이 거의 없어 발견이 늦고 암세포가 원래 발생한 장기를 벗어나 주변으로 급격히 퍼지는 전이가 빈번하다는 점이다.
암이 진행됨에 따라 환자들이 겪는 가장 큰 고통은 배에 물이 차는 복수 현상이다. 특히 암세포가 복강 내로 퍼지는 복막 전이는 환자의 예후를 결정하는 핵심 척도 중 하나다.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복수는 암 진행에 따른 병리적 증상으로만 간주되어 왔다. 이에 따라 지금까지는 단순히 복수를 뽑아내 환자의 통증을 줄여주는 대증요법에만 집중해 왔다.
◇복수, 단순 증상 아닌 암세포의 '생존 보호막' 역할
그런데 복수는 단순한 증상이 아니라, 암세포가 척박한 배 속 환경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영양분을 공급하고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 최근 미국 연구팀에 의해 밝혀졌다.
미국 듀크대학교 의과대학 연구팀은 췌장암, 난소암, 대장암 환자에게서 자주 나타나는 복막 전이 암 유형에서 암세포의 사멸을 억제하는 기전을 규명하기 위해 복수를 지질, 단백질, 소분자 등 성분별로 분리하여 비임상 실험을 실시했다.
◇암세포 사멸 막는 복수의 지질 성분 차단이 관건
연구 결과 복수는 암세포가 복막에 도달하기까지 필요한 생존 에너지를 공급할 뿐만 아니라, 암세포의 사멸을 막는 능동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구체적으로, 복수 내 지질 성분은 암세포가 '페로토시스'라고 불리는 철분 의존성 세포 사멸 과정을 회피하도록 돕는다. 전이 중인 암세포는 외부 환경 노출로 인해 세포막이 산화되며 사멸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복수가 제공하는 지질 보호막이 이를 차단하여 암세포의 영구적인 생존을 보장하는 원리다.
연구팀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지혈증 치료제로 활용되는 미국 앨러간(Allergan)의 '베자립(Bezalip, 성분명 : 베자피브레이트·Bezafibrate)'으로 실험을 진행했다.
'베자립'은 지질단백질을 분해하는 여러 효소의 작용에 개입하여 혈액 중 지질 관련 수치들을 낮추는 기전의 약물이다. 연구팀은 이 기전이 암세포가 복수로부터 지방을 가져다 쓰는 과정을 차단할 수 있을 것이라는 가설을 세우고 이 약물을 복막 전이 암 모델에 투약했다.
◇'베자립', 복수 기능 무력화해 암세포 방어막 허물어
그 결과, 암세포는 복수의 지질을 이용해 세포막을 방어하는 능력이 저하되었다. 즉, 복수를 직접 다 빼내지 않더라도 약물을 통해 복수의 기능만을 선택적으로 무력화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한 것이다.
'베자립'은 이미 수십 년간 고지혈증 치료제로 사용되어 값싸게 접근할 수 있는 치료제다. 복막 전이를 동반한 난치암 환자에게 신속히 투약할 수 있다는 점에서, 향후 경제적이면서도 효율적인 치료 대안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연구팀은 "비임상 단계의 이번 결과가 향후 실제 임상 현장에서 환자들의 생존율을 높이는 실질적인 치료법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