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헬스코리아뉴스 / 이충만] 바이오 산업의 황금기로 불리던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이른바 '떳다방'식 거품이 빠지고 자본 시장의 평가가 정상화되고 있다. 그런데 이 짧은 과열기 동안 우리나라와 중국, 호주가 보여준 급격한 부상이 전통적 강자인 유럽의 '글로벌 2등' 지위를 흔들고 있다는 진단이 나오고 있다.
유럽 바이오 업계의 위기감은 주요 전문 매체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글로벌 바이오 전문지 바이오센츄리(BioCentury)는 최근 바이오 산업의 침체 국면을 '뉴 노멀(New Normal)'로 규정하며, 유럽이 근본적인 위기 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경고했다.
실제 투자 지표를 봐도 바이오 산업은 2021년 팬데믹 시기 정점에 도달했으나, 이후 급격한 침제 국면으로 접어 들었다. 시장조사업체 아이큐비아(IQVIA)에 따르면, 2021년 당시 미국 나스닥에 상장된 바이오 기업은 104개에 달했으나 2022년 22개, 2023년 19개, 2024년 24개 등 20개 내외에 머물고 있다.
아태 지역의 부상과 초기 임상 주도권의 변화
문제는 이러한 환경 변화가 유럽에 직접적인 위협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팬데믹 당시 대규모 투자금을 확보한 바이오 기업들은 생산 시설을 2~3배가량 확장했으나, 엔데믹 이후 수요가 급감하며 공급 과잉과 가동률 저하라는 직격탄을 맞았고, 이는 곧 수익성 악화로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 유럽은 유휴 시설과 수익성 저하를 고심했지만, 중국, 한국, 호주 등은 이러한 시설을 1상 임상시험의 기회로 반전시키며 돌파구로 활용했다. 과잉 공급된 인프라를 신속한 초기 임상 데이터 확보를 위한 허브로 재편함으로써, 유럽이 주도하던 초기 임상 주도권을 빠르게 잠식한 것이다.
바이오센츄리는 이를 두고 "하락장 와중에 비임상 연구 논문이 아닌 신속하게 도출된 임상시험 데이터가 잇따라 출현하자 투자 자본은 유럽을 떠나 아시아 태평양 지역으로 급속도로 이동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행정 절차에 발목 잡힌 유럽의 IND 시스템
이러한 격차는 지역별 1상 임상시험계획(IND) 승인 절차를 비교했을 때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우선 유럽의 경우, 의뢰 기업이 유럽 의약품청(EMA)을 통해 약물의 효능, 안전성, 제조 공정(GMP), 임상 설계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받아야 한다.
이후 개별 국가 규제 당국이 피험자 모집 방식, 동의서 서식, 보상 규정, 의료기관 적합성 등을 다시 한번 검토하며, 이를 바탕으로 각 회원국이 최종 승인 여부를 결정하는 구조다. 각 회원국 간의 협의와 조율 과정을 필수로 거쳐야 하기에 상당한 행정적 시간이 소요될 수밖에 없다.
특히 건강한 자원자를 대상으로 하는 1상의 특성상 피험자 보호와 데이터 무결성을 검증하는 윤리위원회의 권한이 막강하며, 심사 과정 또한 매우 엄격하다.
현행 규정상 EMA의 1상 IND 법정 승인 기간은 공휴일 포함 60일로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이는 제출 서류에 결함이 없다는 완벽한 전제 하에 산정되는 날짜일 뿐, 실제 현장에서는 규제 당국의 정보 수정 요청과 국가 간 협의 과정이 반복되면서, 승인까지 평균 4~5개월이 소요된다.
한국·중국·호주의 신속한 시스템 구축
반면 우리나라와 중국, 호주의 1상 IND 승인 절차는 매우 신속하다. 한국은 식품의약품안전처(식약처)에 1상 IND가 제출되면 30 영업일 이내, 통상 6주 이내에 심사를 마치고 그 결과를 통보하는 체계를 갖추고 있다.
중국과 호주는 이보다 더욱 실리적인 시스템을 운영 중이다.
중국은 1상 IND 접수 후 60 영업일 이내에 국가약품감독관리국(NMPA) 산하 의약품심사평가센터(CDE)의 별도 이의 제기가 없을 경우 승인된 것으로 간주하는 묵시적 승인제를 시행하고 있다.
호주는 절차의 간소화를 극대화했다. 기업이 1상 IND를 호주 의약품관리국(TGA)에 신청하면, TGA는 직접적인 승인 심사 과정을 생략하고 임상 실시 기관에 해당 내용을 통보한다. 실질적인 임상 실시 여부는 각 의료기관의 윤리위원회가 전담하게 하여 행정적 병목 현상을 완전히 제거한 것이다.
요지부동 미국의 지위와 유럽의 과제
이 대목에서 아시아 태평양 국가들의 약진이 미국의 지위까지 위협할 수 있냐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미국은 예외다. 미국 역시 1상 IND 승인 기간을 중국보다도 신속한 30 영업일로 설정하고 있어 속도 경쟁력에서 밀리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미국은 전세계 의약품 시장 점유율 1위이자 글로벌 투자자들의 표준으로 기능하고 있다. 1상 IND의 속도와 관계없이 미국 시장으로 유입되는 자본 규모는 이미 견고한 기준점을 형성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유럽은 '효율 중심의 미국 대비 안전성을 최우선하는 유럽'이라는 구도를 통해 차별화된 입지를 구축해 왔다. 그러나 글로벌 의약품 지형이 속도전 중심으로 급격히 재편되면서, 유럽이 고수해온 엄격한 절차는 차별화 요소가 아닌 산업의 정체를 유발하는 걸림돌로 전락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바이오센츄리는 "효율성이 담보되지 않은 유럽의 전통적 권위는 자본의 외면을 받게 될 것"이라며 비관적 전망을 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