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 오전 국회 의원회관 제8간담회실에서 '약가제도 개편을 통한 건강보험재정 지속가능성 확보 국회 토론회'가 열리고 있다. 2026.03.11.[헬스코리아뉴스 / 이창용 기자] 대한민국이 초고령사회에 진입하며 건강보험 재정의 구조적 위기가 심화되는 가운데, 지나치게 높은 약제비 비중을 낮추기 위해 '성분명 처방'과 '제네릭 약가 제도'를 전면 개편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국회에서 터져 나왔다.
더불어민주당 남인순·이수진·서영석·장종태·김윤 의원과 무상의료운동본부 등 시민단체가 공동 주최하고 국민건강보험노동조합이 주관한 '약가제도 개편을 통한 건강보험재정 지속가능성 확보 국회 토론회'가 11일 오전 국회 의원회관 제8간담회실에서 개최됐다.
◆OECD 평균 웃도는 한국 약제비... "제네릭 효율성 최하위권"
이날 토론회에서 발제자로 나선 나영균 교수(배재대학교 보건의료복지학과)와 정형준 원장(원진녹색병원 대표원장)은 한국의 기형적인 약가 구조를 데이터로 정조준했다.
OECD 약제비지출 통계 (출처: OECD 보건통계-Health Statistics 2025, 보건복지부)OECD 약제비지출 통계에 따르면 2024년 기준 한국의 국민의료비 중 약제비 비중은 20.5%에 달한다. 이는 OECD 평균(14.4%)은 물론 일본(16.2%), 독일(14.2%), 영국(11.8%) 등 주요 선진국보다 월등히 높은 수치다. 특히 1인당 약제비 지출액은 GDP 수준이 비슷한 영국($521)이나 호주($590)와 비교해도 현저히 높다.
제네릭(복제약) 사용량 비중. (출처: OECD Health at a Glance 2025)정형준 원장은 "제네릭(동일성분 의약품)을 많이 쓰면서도 약값이 줄지 않는 역설적 구조가 문제"라며 "미국은 제네릭 사용량 비중이 90%에 달하지만 지출 비중은 20%에 불과한 반면, 한국은 사용량 49%에 지출이 41.7%를 차지해 재정 절감 효과가 사실상 전무하다"고 지적했다.
◆상품명(브랜드명) 처방으로 한국 대체조제율 0.79%, 미국은 91%"
특히 오늘 토론회에서는 한국의 경직된 약가 산정 방식이 도마 위에 올랐다. 우리나라는 오리지널 의약품의 특허가 만료되면 최초 등재되는 제네릭 가격을 오리지널 대비 53.55%로 산정하는 방식이 일종의 공식처럼 유지돼 왔다.
오리지널 대비 제네릭 가격 비율(%, 국제비교). (출처: PLOS ONE, 'Comparison of generic drug prices in Korea and eight high-income countries', 2025.03.)나영균 교수는 "미국, 영국 등은 다수의 경쟁자가 진입하면 1년 이내에 가격이 10~20% 수준으로 급락하는 시장 기전이 작동하지만, 한국은 정부가 정해준 53.55%라는 가격이 일종의 하한선처럼 작용해 가격 인하 경쟁이 발생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대체조제율 국제비교(%). (출처: 의약품정책연구소, 2025.07.)무엇보다 '상품명(브랜드명) 처방' 관행이 약가 경쟁을 가로막는다는 지적이다. 현재 한국의 대체조제율은 0.79%로 사실상 그 기능을 상실했다. 이는 80~90%대를 기록하는 미국 등 선진국과 대조적이다.
나영균 교수는 "의사가 특정 브랜드로 처방하면 약사가 저렴한 제네릭으로 교체하기 어려운 구조"라며 "이로 인해 제네릭 가격이 높은 수준에서 고착화되고, 제약사들은 가격 경쟁 대신 리베이트와 마케팅에 의존하는 비효율적 시장이 형성됐다"고 비판했다.
글로벌 혁신 신약 출시 1년 내 도입율(%), (출처: OECD Health at a Glance 2025)실제로 특허 만료된 240개 성분 중 제네릭이 오리지널보다 저렴한 경우는 단 5.4%(13개)에 불과하며, 한국의 제네릭 약가는 OECD 평균의 2.14배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 결과 한국은 높은 약제비 지출에도 불구하고 혁신 신약 도입 비중은 OECD 29위로 최하위권에 머물러 있는 '혁신의 역설'이 발생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노인 약품비 사상 첫 50% 돌파... "성분명 처방 의무화 시범사업 제안"
건보 재정의 위기는 수치로도 증명됐다. 한국의 약품비 지출은 2011년 13조 1000억 원에서 2024년 27조 원으로 2배 이상 급증했다. 특히 2024년 노인 약품비 비중은 사상 처음으로 50%를 넘어선 51.7%를 기록했다.
건강보험 약품비 지출 추이 및 노인 약품비 비중(단위:조 원, %). (출처: 건강보험심사평가원, 2023년 건강보험 약품비 통계/국회미래연구원, 2025.12.30.)이에 대해 토론자들은 보건의료체계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구체적인 약가 정책 로드맵을 제시했다.
첫째, '품절약' 대상 성분명 처방 시범사업 도입이다. 제약사가 수익성 저하로 공급을 기피하는 품절약에 대해 국제일반명(INN) 등재를 강제하고 성분명 처방을 의무화하여 환자의 의약품 접근성을 높여야 한다는 주장이다.
둘째, 건강보험공단의 약가 계약 주도권 강화다. 약품 경제성 평가 전담 전문기관을 건보공단 산하에 두어 제약 기업의 이익에 휘둘리지 않는 객관적인 약가 조정을 시행해야 한다는 제언이 나왔다.
셋째, 비대면 진료 시 성분명 처방 의무화다. 원격지 약국에서 상품명 처방 약을 구하기 어려운 현실과 영리 중개 앱의 부작용을 막기 위해, 재진 만성질환 중심의 비대면 진료에는 성분명 처방만을 인정해야 한다는 논리다.
11일 오전 국회 의원회관 제8간담회실에서 열린 '약가제도 개편을 통한 건강보험재정 지속가능성 확보 국회 토론회'에서 참석자들이 기념 사진을 담고 있다. 2026.03.11.토론회 좌장을 맡은 김준현 소장(건강정책참여연구소)은 "고령화로 인해 처방량 증가는 불가피하지만, 약품의 공급과 처방 과정을 국민의 입장에서 재설계해야 한다"며 "다수 국민의 부담 경감에 초점을 맞춘 국가적 계획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