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헬스코리아뉴스 / 서정필] 구명정과 항암신약. 생명을 잃을 위험에 처한 이들을 구한다는 공통점은 있지만, 제조 과정과 기술 영역에서는 거의 접점을 찾기 어렵다. 그렇기에 구명정 제조사에서 바이오 전문기업으로 변신한 HLB의 행보는 언제나 주목을 받아왔다. 2008년 진양곤 이사회 의장이 바이오를 미래 성장동력으로 낙점한 지 어느덧 18년. 이 회사는 올해 간암 신약 '리보세라닙'과 담도암 신약 '리라푸그라티닙'의 FDA 승인을 정면으로 노리고 있다. 결과에 따라 18년의 투자가 결실로 이어지는 기념비적 해가 될 수도 있고, 또 한 번의 아쉬움이 남는 한 해로 남을 수도 있다. 임상 데이터와 시장 상황은 긍정적 전망을 낳고 있지만, 제조·품질 관리 부문은 여전히 마지막 변수로 남아 있다. 결국 HLB의 변화는 '구명정 기업의 바이오 도전'이라는 상징을 넘어, 한국 바이오 산업의 성장 가능성을 가늠하는 시험대가 될 것으로 보인다. <편집자 주>
지난해 12월 23일 열린 HLB 학동 사옥 개소식 (사진 HLB)글로벌 시장 겨냥한 '두 개의 파이프라인' ... '리보세라닙'과 '리라푸그라티닙'
담도암 치료제 리라푸그라티닙 역시 임상 2상에서 객관적 반응률(ORR) 47%를 기록했다는 HLB 자회사 엘레바의 보도자료 HLB의 핵심 전략 자산은 간암 치료제 '리보세라닙'과 담도암 치료제 '리라푸그라티닙'이다. 글로벌 제약·바이오 시장조사기관 이밸류에이트파마(EvaluatePharma), IQVIA, HLB 미국 자회사 '엘레바(Elevar)'가 제시한 상업성 평가 보고서에 따르면, 두 치료제가 타깃으로 하는 시장의 잠재력은 매우 큰 것으로 분석된다. 해당 보고서들을 종합하면, 리보세라닙과 리라푸그라티닙이 진입을 노리는 글로벌 유효 시장(TAM)은 간암(HCC) 약 120억 달러(약 16조 원), 담도암(BTC) 약 25억 달러(약 3조 4000억 원) 규모다.
두 시장 모두 매년 10% 이상의 높은 성장률을 보이며 확대되고 있다. 특히 간암 분야는 기존 표준 치료제의 효과 한계가 뚜렷해 혁신 신약에 대한 미충족 의료수요(unmet needs)가 큰 영역으로 평가된다.
간암 1차 치료제 리보세라닙은 면역항암제 캄렐리주맙과 병용요법으로 글로벌 임상 3상에서 전체 생존기간 중앙값(mOS) 23.8개월이라는 기록적 수치를 확보했다. 캄렐리주맙이 면역세포 활성화를 유도해 암세포를 공격하는 동안, 리보세라닙은 종양 내 혈관 환경을 개선해 면역세포 침투를 돕는다. 이러한 이중 타격 기전은 기존 표준 치료제 대비 사망 위험을 36% 낮추는 결과로 이어졌다.
담도암 치료제 리라푸그라티닙 역시 임상 2상에서 객관적 반응률(ORR) 47%를 기록하며 경쟁력을 입증했다. 이는 기존 시장 점유 약물(36~42%) 대비 유의미하게 높은 수치다. HLB는 이 데이터를 바탕으로 FDA 가속승인(Accelerated Approval) 절차를 추진 중이다. 시장 조기 진입을 노리는 것이다. 가속승인은 생명을 위협하는 암·에이즈 등 질환에서 기존 대비 임상적 이점을 보일 경우 상업화를 앞당겨주는 제도다.
재무제표의 두 얼굴 ... 적자긴 하지만 매출은 성장
재무제표만 보면 HLB는 여전히 적자 상태다. 2025년 3분기 누적 공시 기준 영업손실은 현재 진행형이다. 이는 글로벌 임상과 마케팅 인프라 구축에 따른 R&D 비용 지출 때문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수치 속에는 긍정적 신호도 발견된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매출의 폭발적 증가다. HLB의 연결 기준 매출은 2022년 약 1700억 원대에서 2024년 4000억 원을 돌파하며 2년 만에 2배 이상 성장했다. 2025년 상반기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300% 이상 급증했다. 이는 선박 부문의 안정적 매출에 더해, 인수 계열사의 실적 본격화와 진단키트 등 바이오 매출이 가시화된 결과다.
부채비율도 2023년 70%대에서 2025년 현재 20% 미만으로 크게 낮아졌다. 이는 유상증자와 전환사채(CB)의 자본 전환 등을 통해 부채를 조기 상환하며 사실상 '무차입 경영'에 가까운 구조를 구축한 결과다.
5,000억 실탄과 '직판' 전략: 수익 구조의 대전환
매출 성장과 부채 감소 속에서 HLB가 보유한 약 5000억 원 규모 현금성 자산은 승인 이후를 대비한 전략적 '실탄'이 될 전망이다. HLB는 판권을 다국적 제약사에 넘기지 않고 미국 현지 법인을 통해 직접 판매(Direct Sales)하는 방식을 택했다.
미국 자회사 '엘레바'의 자체 평가보고서를 보면, 이 전략이 자리 잡을 경우 영업이익률을 현재 대비 80% 수준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 보고서는 특히 리보세라닙은 제조 원가가 낮은 화학합성 의약품이기 때문에 미국 시장 진입 시 회사의 영업이익이 연간 약 2조 5000억 원을 넘어설 것으로 평가했다. 국내 제약바이오 기업으로서는 상상조차 힘든 '장밋빛 전망'인 셈이다. 대규모 R&D 투자 구조를 단숨에 흑자로 전환하며 거대한 캐시카우를 확보하겠다는 것이 이 회사의 청사진이다.
제조·품질 관리(CMC) 보완 ... FDA 승인 마지막 고비
지난 2024년 5월 간암 1차 치료제 리보세라닙과 면역항암제 캄렐리주맙 병용요법에 대해 FDA가 승인을 거부했다는 해외 언론 보도 임상 데이터와 재무 구조는 개선됐지만, 넘어야 할 마지막 난관은 존재한다. 바로 제조·품질관리(CMC)의 완벽한 증명이다.
HLB는 과거 FDA로부터 두 차례 CRL(보완요구서한)을 수령했다. 두 서한 모두 약효가 아닌 생산 시스템 관련 기술적 지적이었다. 2024년 5월 수령한 1차 CRL은 캄렐리주맙 제조사인 중국 항서제약의 멸균 공정·품질 관리 시스템(QMS) 미비가 원인이었으며, 지난해 2차 CRL은 임상 현장 실사(BIMO) 과정에서 데이터 무결성과 기록 관리가 충분하지 못하다는 내용이었다.
HLB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삼성바이오로직스의 성장을 이끌었던 김태한 총괄 회장을 영입했다. 김 회장은 취임 후 생산 전 과정을 미국 cGMP 기준에 맞춰 재설계하고, 데이터 무결성을 실시간 모니터링하는 시스템을 구축해 투명성과 규제 대응력을 강화했다. 2026년 하반기로 예정된 FDA 최종 결정에서 이러한 개선이 충분히 입증될지가 승인의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회사측은 두 약물에 대한 FDA 가속승인을 이달 중 신청한다는 방침이다. FDA가 언제쯤 승인여부를 결정할지는 예단할 수 없지만, 이미 약물의 효능과 안정성이 입증된만큼, 이르면 올해 하반기, 늦어도 내년 상반기에는 그 윤곽이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는 HLB뿐 아니라 대한민국 바이오 산업 전체의 중요한 이정표(하드캐리-hard carry)가 될 공산이 크다. 18년 전 무모해 보였던 '구명정 회사의 K-바이오 대표주자 도전기'가 마지막 장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아래 사설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