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자접착제 개발에 AI가 본격 투입되면서 후보물질 발굴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 (사진은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해 AI 제미나이로 만든 분자접착제 개념도) [헬스코리아뉴스=서정필] 두 단백질을 근접시켜 새로운 상호작용을 유도하는 저분자화합물인 분자접착제(molecular glue) 개발에 AI가 본격 투입되면서 후보물질 발굴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 기존의 무작위 스크리닝에 의존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AI가 표적-리가아제 조합을 좁혀주고 있기 때문이다.
기존 치료제가 닿지 못했던 영역 겨냥하는 기술
분자접착제의 강점은 겨냥할 수 있는 표적 범위가 넓다는 데 있다. 기존 약물이 단백질 활성 부위를 직접 봉쇄하는 방식이라면, 분자접착제는 단백질끼리 만나게 해 효과를 낸다.
구조적으로 약물이 파고들 틈이 없어 기존 치료제로 접근하기 어려웠던 '약물불가표적(undruggable target)'까지 겨냥할 수 있다. 인체 단백질체(프로테옴·proteome)의 약 85%는 기존 저분자 약물로 표적화하기 어려운 난치성 단백질로 분류된다. 분자접착제가 열 수 있는 시장이 그만큼 넓다는 의미다.
문제는 만날 수 있는 단백질 조합을 찾는 과정이었다. 어떤 단백질 쌍이 결합할 수 있는지, 어떤 화합물이 이를 유도하는지 확인하는 작업은 오랫동안 우연에 의존했다.
테르나리 테라퓨틱스(Ternary Therapeutics)의 크리스 테임(Chris Tame) 최고경영자(CEO)는 "분자접착제는 지난 10년간 신약 개발에서 가장 흥미로운 성과를 냈지만, 역사적으로 체계적 과정이 아닌 우연에 의해 발견돼 왔다"고 지적했다.
예측 가능한 영역으로 들어온 후보물질 탐색
AI는 이 같은 우연성을 예측 가능한 설계 영역으로 전환하고 있다. 현재는 오리오니스 바이오사이언스(Orionis Biosciences)의 알로글루(Allo-Glue) 플랫폼과 에라스카(Erasca)의 'CypA 정밀 최적화 전략'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이 흐름을 이끌고 있다.
프레시던스 리서치(Precedence Research)에 따르면 글로벌 분자접착제 시장은 지난해 26억 5000만 달러(약 3조7000억원)에서 2035년 115억9000만 달러(약 16조2000억원)로 성장할 전망이다. 연평균 성장률(CAGR)은 15.9%로 추산된다. AI를 기반으로 접착할 수 있는 단백질 짝을 발굴하는 플랫폼 발전이 이 성장을 가속화하는 핵심 변수로 꼽힌다.
오리오니스 바이오사이언스의 알로글루(Allo-Glue)는 세포 안 수억 개의 단백질 상호작용을 통째로 탐색하는 플랫폼이다. 단백질의 주요 결합 부위가 아닌 측면 공간(allostery)에 작용하는 분자접착제를 AI로 찾는 방식이다.
표적 단백질과 E3 유비퀴틴 리가아제의 최적 조합을 AI가 추려내면 로봇 자동화 시스템이 대량 실험으로 검증한다. 특정 단백질에 집중하지 않고 새 조합을 계속 발굴하는 구조여서, 광범위한 질환 영역에 적용할 수 있다.
오리오니스 바이오사이언스 수석 데이터 과학자 리카르도 사바티니(Riccardo Sabatini)는 "AI와 로봇 자동화의 발전으로 표적-리가아제 쌍 선정부터 후보물질 최적화까지 전 과정이 빨라졌다"고 밝혔다.
빅파마들도 탐내는 AI 기술, 후보 물질 단숨에 발굴
빅파마들의 관심도 커지고 있다. 로슈(Roche) 자회사 제넨텍(Genentech)은 지난해 5월 오리오니스와 선급금 1억 500만 달러(약 1452억원), 마일스톤 최대 20억 달러(약 2조 7652억원) 규모의 계약을 체결했다.
노바티스(Novartis)는 올해 6월 10일 두 번째 다년간 협력 계약을 체결했다. 선급금 4000만 달러(약 610억원), 마일스톤 최대 14억 달러(약 2조 1400억원) 조건이다. 노바티스와 오리오니스 바이오사이언스는 2020년에도 협력 계약을 맺은 바 있다.
노바티스는 AI와 분자접착제를 결합한 기술로 상당한 성과를 내고 있다. 헌팅턴병 연구에서 생성형 AI로 1500만 개의 잠재 화합물을 설계하고 예측 모델로 핵심 특성을 평가한 결과, 실험실에서 합성한 분자를 약 60개로 압축해 뇌 투과성을 갖춘 분자접착제 분해제 후보물질을 도출했다. AI가 없었다면 수천 개의 화합물을 직접 합성해야 했을 과정이다.
오리오니스가 프로테옴 전체를 스캔해 새 조합을 찾는다면, 에라스카의 'CypA 정밀 최적화 전략'은 단백질 하나에 집중해 효능을 극대화하는 방식을 택했다. 서로 다른 경로지만 AI를 설계 핵심에 놓는다는 점은 같다.
에라스카가 개발 중인 물질 'ERAS-0015'는 사이클로필린A(cyclophilin A·CypA)에 대한 결합 친화도 최적화에 역량을 집중한 범(汎)RAS 분자접착제다. 변이 종류와 무관하게 RAS 단백질 전반을 억제하도록 설계됐다. CypA를 매개로 RAS의 활성형(GTP 결합 상태)에 결합하는 원리다.
전임상에서 같은 기전의 비교약물 '다락손라십(daraxonrasib·RMC-6236)' 대비 CypA 결합 친화도가 8~21배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세포 내 RAS 억제 효능은 약 5배 강하고, 동물실험에서는 10분의 1 용량으로 동등한 종양 억제 효과를 냈다. 단, 이는 헤드투헤드(head-to-head) 임상 비교가 아닌 전임상 수치다.
4월 27일 공개된 1상(AURORAS-1) 결과, 'ERAS-0015'의 미확인 객관적반응률(uORR)은 KRAS G12X 변이 비소세포폐암(NSCLC) 2차 치료 환자에서 62%, 면역항암제·백금제 이후 투여군에서는 75%를 기록했다. 췌장암(PDAC·pancreatic ductal adenocarcinoma) 2차 치료에서는 uORR 40~50%였다. 용량 반응 평가 가능 환자 14명 전원에서 KRAS G12X 순환종양DNA(ctDNA·circulating tumor DNA)가 75% 이상 감소했다.
안전성도 확인됐다. 용량제한독성(DLT·dose-limiting toxicity) 없이 대부분 저등급 이상반응에 그쳤고, 이상반응으로 인한 투약 중단은 없었다. 에라스카는 1상 확장 코호트 데이터를 2027년 상반기 공개할 예정이다.
오리오니스가 새 표적-리가아제 조합을 체계적으로 발굴하는 플랫폼을 구축했다면 에라스카는 AI 기반 최적화로 알려진 기전의 효능을 극대화했다고 정리할 수 있다.
AI 기반 분자접착제 발굴이 보편화되고 프로테옴의 85%가 새 표적으로 열린다는 것은 단순한 시장 확대가 아니라 치료 가능한 질환의 범주가 넓어진다는 의미다. 나아가 단백질 짝을 찾는 비용과 시간이 줄어들수록 희귀질환과 소아암처럼 상업성이 낮아 외면받던 영역에도 개발 동력이 생기고, 치료제가 없는 환자들에게도 선택지가 생길 수 있다. 분자접착제가 항암제를 넘어 신경퇴행성 질환, 자가면역 질환으로 적응증을 넓혀가는 흐름도 이 기술 보편화와 맞물려 가속화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