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TAC(표적 단백질 분해 기술)의 작동 원리. (왼쪽) 기존의 단백질 억제제 방식은 결합 공간(Pocket)이 없는 단백질은 공략하지 못해 '언드러거블(Undruggable, 약물 불가)' 표적으로 남았다. (오른쪽) 반면, FDA가 처음 승인한 '베파누' 등 PROTAC 계열은 표적 단백질과 E3 리가제를 연결하는 '삼원 복합체'를 형성, 세포 내 폐기 시스템인 프로테아좀을 통해 단백질을 통째로 분해해 없앤다. (사진=AI 생성 이미지)[헬스코리아뉴스 / 서정필] 단백질을 단순히 억제하는 것을 넘어 아예 분해해 없애버리는 새로운 암 치료의 시대가 열렸다. 미국 식품의약국(FDA)이 지난 1일(현지시간) 아르비나스(Arvinas)와 화이자(Pfizer)가 공동 개발한 '베파누(Veppanu, 성분명 베프데게스트란트·vepdegestrant)'를 승인했다.
ESR1 변이를 동반하고 기존 내분비요법 이후 질병이 진행한 ER 양성·HER2 음성 전이성 유방암 성인 환자를 대상으로 한다. 이 약은 FDA가 승인한 첫 프로탁(PROTAC, PROteolysis TArgeting Chimera·표적 단백질 분해 기술) 계열 치료제다. 단순히 새 약이 나온 게 아니다. 약을 만드는 방식 자체가 바뀌었다.
랜디 틸(Randy Teel) 아르비나스 최고경영자는 "이번 승인은 아르비나스에 있어 변혁적 순간이다. 2013년부터 개척해 온 기술을 기반으로 첫 승인 약물이자 최초의 PROTAC 승인 치료제를 달성했다"며 "이 이정표는 표적 단백질 분해가 실질적인 임상적 성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입증한 것"이라고 말했다.
기존 치료제, '결합 주머니' 없으면 공략 불가능
2000년대 들어 암 치료제 개발의 지배적 패러다임은 단백질에 결합한 뒤 그 활동을 억제하는 것이었다. 소분자 억제제든 단일클론항체든 핵심 논리는 같다.
문제는 이 방식이 가진 구조적 한계다. 약물이 달라붙을 수 있는 물리적 공간, 즉 활성 부위(active site)나 결합 주머니(binding pocket)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표면이 평탄하거나 단백질-단백질 상호작용(Protein-Protein Interaction, PPI) 계면처럼 결합 공간을 확보하기 어려운 단백질은 처음부터 표적 후보에서 밀려난다. 이를 '언드러거블(undruggable·약물 공략 불가 표적)'이라 불러온 이유다.
KRAS가 대표적이다. 췌장암·대장암·폐암에서 가장 흔히 발견되는 돌연변이 중 하나지만, 결합 가능한 구조적 포켓이 불분명하다는 이유로 수십 년간 신약 개발의 난제로 분류됐다. 여기에 균열을 낸 약물이 최근 승인된 KRAS G12C 변이를 표적으로 한 '루마크라스(Lumakras, 성분명 : 소토라십·Sotorasib)'·'크라자티(Krazati, 성분명 : 아다그라십·Adagrasib)'다.
다만 두 약물은 G12C라는 특정 변이에만 유효하고 내성 발현도 빠르다. 같은 KRAS 계열 돌연변이로 G12D처럼 구조적으로 더 어려운 변이는 아직 승인된 표적치료제가 없다. 레볼루션 메디신(Revolution Medicines)의 '졸도라시브(Zoldonrasib, 코드명 RMC-9805)'이 KRAS G12D 변이 비소세포폐암 1상에서 반응률 61%를 기록하며 올해 초 FDA 혁신치료제 지정을 받는 등 벽이 서서히 뚫리고 있지만, 기존 '결합해서 막는' 방식의 구조적 한계는 벗어나지 못했다.
'억제'에서 '제거'로 … 암 치료 새로운 문법 이식
PROTAC은 다른 문법을 따른다. 표적 단백질을 억제하는 대신 세포 안에서 통째로 분해한다. 작동 방식은 이렇다. PROTAC 분자의 한쪽 끝은 표적 단백질과 결합하고, 다른 쪽 끝은 세포 내 단백질 폐기 시스템인 유비퀴틴 연결효소(E3 ligase)와 연결된다. 두 연결이 동시에 이뤄지면 표적 단백질에 분해 꼬리표(유비퀴틴)가 붙고, 프로테아좀이 이를 인식해 제거한다. 표적 단백질이 아예 사라지는 것이다.
결합 공간의 유무가 표적 선정의 전제 조건이 아니기 때문에, 기존 억제제가 손대기 어려웠던 단백질도 이론적으로 사정권에 들어온다. 내성 발현 양상도 달라질 가능성이 있다. 기존 억제제는 단백질이 과발현되거나 약물 결합 부위가 변이를 통해 바뀌는 방식으로 내성이 생긴다. 단백질 자체가 사라지면 이 경로를 우회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다. 다만 PROTAC 계열에서도 E3 ligase 발현 변화 등 별도 내성 기전이 보고되고 있어, 내성 문제를 완전히 해소할 수 있을지는 추가 임상 데이터가 필요하다는 게 학계의 시각이다.
베파누(Veppanu, 성분명 베프데게스트란트·vepdegestrant)의 화학 구조식. 분자의 왼쪽 끝(에스트로겐 수용체 결합부)과 오른쪽 끝(E3 리가제 결합부)이 링커로 연결된 전형적인 PROTAC 이중기능 구조를 보여준다. 결합 포켓' 한계 넘어 '약물 불가' 표적도 사정권
현재 기존 억제제 방식으로는 여전히 손대기 어려운 단백질들이 적지 않다. △암에서 가장 흔히 과발현되는 전사인자임에도 결합 포켓 자체가 없어 수십 년째 직접 표적이 불가능한 MYC, △Wnt 신호 경로를 매개하는 핵심 단백질이면서도 결합 가능한 구조적 포켓이 없는 β-카테닌, △다양한 고형암에서 과활성화되지만 직접 억제제가 요원한 YAP/TAZ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기존 억제제 방식이 KRAS 등 약물 불가 영역을 하나씩 허물어가는 동시에, 결합 공간의 존재와 관계없이 단백질을 분해하는 플랫폼이 임상 현장에 진입하면서 그간 치료 대안이 없었던 환자들에게 다각적인 치료 기회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된다.
40개 파이프라인이 기다리던 첫 승인 소식
본지 취재 결과 현재 전 세계에서 임상 단계에 진입한 프로탁 후보 물질은 40개가 넘는 것으로 파악됐다. 혈액암, 고형암, 자가면역 질환, 신경 퇴행성 질환 등 적응증도 다양하다. 이들 파이프라인에 대한 개발자들의 공통된 소망은 결국 하나로 모아진다. "우리가 만든 약물을 실제 환자에게 쓸 수 있는가"에 대한 규제 기관, 특히 FDA의 답이었다. 그 답이 이번에 나온 것이다. 임상 설계와 규제 전략의 기준점이 생긴 것이다.
현재 개발 중인 대표적인 프로탁 후보 물질은 임상 3상 단계에 진입한 2개 약물이다. BMS의 안드로겐 수용체 표적 거세저항성 전립선암 치료제 'BMS-986365'와 비원 메디신(BeOne Medicines, 옛 BeiGene)의 BTK 표적 혈액암 치료제 'BGB-16673'이다. 'BGB-16673'은 기존 BTK 억제제의 내성 문제를 프로탁으로 돌파할 수 있는지 검증하는 임상이기도 하다. 이밖에 아르비나스의 'ARV-806'은 KRAS G12D를 표적으로 하는 PROTAC으로 현재 1상을 진행 중이다. 회사측은 올해 중에 'ARV-806'에 대한 첫 임상 데이터를 공개할 예정이다.
참고로 마카오대학교 연구팀이 유럽의약화학저널(European Journal of Medicinal Chemistry)에 발표한 분석(2025)에 따르면 2023~2024년 사이 PROTAC 관련 임상시험은 57%, 특허 패밀리는 28% 증가했다.
한계 속에서도 빛난 '첫 승인'… '프로탁' 플랫폼 시대의 서막
이번 '베파누' 승인은 여러 측면에서 시사적이다. 우선 ESR1 변이 환자에서 중앙 무진행생존기간(PFS) 5.0개월은 대조군인 아스트라제네카(AstraZeneca)의 '파슬로덱스(Faslodex, 성분명 풀베스트란트·fulvestrant)' 대비 2.1개월을 앞섰지만, 고무적 수치로 보기 어렵고 전체생존기간(OS) 데이터도 아직은 미숙하다. 여기에 두 건의 병용 3상을 조기 종료하면서 단독요법 이외 적응증 확장 경로도 좁아졌다. 상업화는 제3의 파트너를 통한 아웃라이선스 방식으로 추진 중이어서 실제 출시 일정과 가격 및 접근성도 여전히 미지수다.
하지만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번 승인이 남긴 족적은 분명하다. 암 치료 현장에 단백질 자체를 분해해 없앤다는 '새로운 문법'이 공식적으로 적용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향후 '베파누'의 임상 데이터가 축적되고 후속 파이프라인이 개발되다 보면 'PROTAC(표적 단백질 분해 기술)'이라는 플랫폼의 윤곽도 더욱 선명해질 것으로 전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