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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구 박사 칼럼>누가 이 사람을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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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미래신문) 참 오랜만에 한·일 관계가 정상화 되었다. 그러나 한쪽에서는 여전히 굴욕외교라고 날을 세우고 있고,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정권을 무너뜨리려고 말을 만들어 내고, 100년 전의 일을 무릎 꿇고 사과하라고 한다. 사실 우리는 일본의 침략과 찬탈을 몸으로 경험했던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반일> 프레임은 아직도 국민 50%에게 먹혀들고 있다. 해방된 지 80여 년이 가까워 왔지만, 상대를 무너뜨릴 때 <토착 왜구>니, <친일 행적>을 들먹이며, 사람을 매장시키고 있었다.

 

심지어 철저한 반공주의자이며, <일본 내막기>를 써서 일본의 음흉한 속내를 밝혀낸 이승만 초대 대통령도 친일파로 매도(罵倒)하고, 박정희 대통령도 친일파로 몰아세웠다. 그리고 종북세력들은 미군 철수를 입에 달고 다니면서, 대한민국이 허물어지기를 소원하고 있다.

그런데 따져보자. 우리는 6.25때 중공군의 개입으로 통일을 눈앞에서 놓쳤다. 이처럼 중국은 우리의 통일을 방해했을 뿐만 아니라, 수천 년 동안 우리나라를 침략했고 조공을 받아간 주 적이다. 그럼에도 중국에 대해서는 입도 뻥긋 못하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사실 우리나라는 지정학적으로 강대국에 둘러싸여 외침에 시달리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의 혜안이자 ‘신의 한 수’로, <한·미동맹>을 함으로써 70여 년 동안 나라의 기틀을 세울 수 있었고, 자유대한민국은 선진국 대열에 올라설 수 있게 되었다. 

 

얼마 전 일본의 지한파의 대표자이신 동경 성서 그리스도 교회의 담임 목사인 오야마 레이지 목사가 96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전후에 일본이 한국 침략에 대해서 진심으로 가슴앓이를 하고, 사죄 운동의 선봉장이 되었었다. 특히 그는 3.1운동 당시 제암리 감리교회 성도들을 일본 헌병이 불을 질러 모두 죽게 한 것을 가슴 아파하면서, 모금 운동을 해서 제암리 감리교회를 재건하기도 했었다.

나는 35년 전부터 오야마 레이지 목사를 가까이하면서 동경 성서 그리스도 교회에 두 번이나 집회를 갔었고, 작은 신학교에 강의도 했었다. 그리고 나도 그를 몇 번 한국에 초청했고, 그는 나의 책을 그가 운영하는 <요군, 羊群> 잡지에 2년간 연재도 하고 단행본으로 출판해 주었다. 그는 늘 <한국인이 그만하라 할 때까지 사과하겠다>고 했다. 

 

 내가 대신대 총장 시절에는 아예 일본에서 <화해의 사죄 사절단> 10여 명이 찾아와서 일제 침략의 용서를 구할 뿐 아니라, <독도는 한국 땅>이라고 명백히 발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으로 일본은 <황민화 정책>을 수행하면서 <신사 참배 강요>를 획책했었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은 서울을 비롯한 모든 도시에 <신사(神社>를 짖고 국민 총동원령을 내려 천조 대신에게 절을 하고, 동방요배를 하도록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당시 한국 교회는 찍소리 한 번 못하고 당국의 방침이라 하여 순종하고 <신사 참배 결의>까지 총회에서 공식가결하고, 그 후 지도자들은 신사로 달려가서 절을 했고, ‘장로호’라는 비행기까지 헌납했었다. 하지만 깨어 있는 목사와 전도사, 장로들은 ‘신사 참배는 분명히 제1계명을 어기는 우상 숭배다’라는 것을 천명하고, 신사 참배 반대 운동에 앞장섰다.

그중에 순교자 주기철, 손양원 목사를 비롯해서, 박관준 장로 등은 이미 한국 교회에서 잘 알려지신 분들이다. 감사하게도 나는 젊은 시절 출옥 성도들의 설교를 듣거나, 그들과 교제한 일이 내 일생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특별히 신사 참배 반대 운동에 앞장섰던 한상동 목사님의 설교와 강의를 들었던 것이 기억에 늘 새롭다. 그 외에도 손명복 목사님과 안이숙 여사, 한부선 목사님, 그리고 나에게 목사 안수를 주셨던 이인재 목사님의 설교는 55년이 지난 지금도 뚜렷하다.

 

그런데 일제의 황민화 정책과 신사 참배 운동에 항거하다가 순교하신 분들이나 출옥하신 분들 중에는 순교자로 대접받기보다 애국자로 잘 알려져 있다. 주기철 목사님은 애국자로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있고, 지자체에서는 애국지사 손양원 기념관을 지었다. 그러나 그들은 애국하려고 신사 참배 반대를 생명 걸고 했던 것이 아니다. 그들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지고, 우상 앞에 절을 할 수 없다’는 순수한 신앙의 차원에서 일제의 갖은 고문과 겁박과 치욕을 참아내고 생명을 바쳤다.

그래서 신사 참배를 반대했던 순교자들이나 출옥 성도들은, 한국 교회와 사회로부터 그에 맞는 명예와 칭송을 받았고 흠모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정작 신사 참배를 계획하고 앞에서 지휘한 총 사령관격인 <이기선 목사>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기선 목사는 평양신학교 8회 졸업생으로 경남 지역과 평안북도에서 목회하면서 신사 참배 반대 운동의 원칙을 세우고, 그 급박한 시기에 동조자 30여 명을 모으고 가르치고 격려하면서 신사 참배 반대 운동의 최전방에 서서 동분서주했다. 사실 이기선 목사는 주기철 목사를 중매하였고 그를 지도한 셈이다. 그는 연약한 몸이었지만 강단에 서면 불꽃이 되었고, 옥중에서 깨달은 해박한 성경 지식을 글로 만들고, 노래를 만들어 거사를 지휘했다. 이기선 목사는 평안북도에서, 주기철 목사는 평양을 중심으로, 한상동 목사는 경남을 중심으로, 그리고 만주에서는 한부선 선교사가 조직적 항거를 했다.

그렇게 이기선 목사는 신사 참배 반대 운동의 선봉장으로 지휘하다 7년의 옥고를 치루고 나와서, “변절 된 한국 교회는 회개하고 다시 재건 되어야 한다!”고 발을 굴리며 외쳤다. 그리고 끝내 그는 1950년 공산당에 의해서 순교 당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신사 참배를 했던 지도자들은 의도적으로 그를 외면했고, 순교자들이나 출옥 성도들도 주변의 환호에 영광을 다 받았지만, 최전선에서 일본의 신사 참배 반대 운동을 지휘했던 <이기선> 목사에 대해서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고 있다.


「누가 이 사람을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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