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북로아군실전기(北路我軍實戰記)]-(40)

김종해 한중우의공원 관장
김종해 한중우의공원 관장

‘묘령’(廟嶺)은 현재 화룡시 부흥향 흥서촌 소속으로 화룡시에서 보면 북쪽으로 완만한 언덕처럼 된 산줄기가 횡으로 보이는데 그 고갯길이 묘령이고 고갯길의 남단에 위치한 마을이 ‘묘령촌’(廟嶺村)이다. 묘령은 마을 뒷산에 옛 사당이 있어 묘령이라 불렀다. 중국에는 동북지역만 하더라도 고갯길 부근에는 묘령이라는 지명을 가진 곳이 수없이 많다. 고갯길을 무사히 지나게 해달라는 기원일 수도 있고 높은 곳에 신좌를 두는 민간 신앙적 요인도 작용한 것 같다. 우리나라의 성황당 정도로 봐도 무관하다. 현재 묘령촌은 아직도 그 지명을 그대로 사용하며 우리 동포들의 마을이다.

김좌진은 묘령고개를 넘어 ‘삼도구’(三道溝) 방향으로 병력을 인솔해 갔다. 삼도구는 청산리계곡으로부터 송월평에 이르는 긴 골짜기의 명칭이다. 그러나 그 지역사람들은 송월평에서 지금의 청산촌까지를 삼도구로, 청산촌부터 직소택부근까지의 계곡을 청산리계곡이라 부르기도 한다. 삼도구의 입구에 위치한 마을이 ‘송월평’(松月坪)이며 다음이 ‘십리평’(十里坪)이다. 십리평은 예전에는 ‘평양촌’(平壤村)이라고도 불렀다. 십리평 일대에 병력을 전개하고 차후 노선을 강구하고 있었다. 이때가 10월 18일이었다. 북로군정서가 묘산을 떠난 것은 10월 13일이며 10월 15일경에는 송월평을 거쳐 십리평에 도착했다.

화룡시 묘령촌 모습.
화룡시 묘령촌 모습.

 

이즈음 묘령에서 제 단체 연석회의를 소집하게 된다. 일본군의 대규모 부대침입과 화룡일대로 집결한 독립군과의 마찰이 불가피해 보이자 거기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기 위한 회의였다. 이 회합을 소집한 이는 맹부덕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는 당시의 상황을 대체로 상세하게 기록해 놓은 이범석의 ‘자전’에 잘 나와 있다.

“우리가 겨우 삼도구 어구지의 송림평이라는 큰 부락에 도착했을 때 중국군인 하나가 나타났다.(중략) “북로군정서의 수뇌부 책임자를 만나게 해주시오. 맹사령관이 중요한 일로 책임자를 만나자는 전갈입니다.”(중략) 맹사령관이 우리를 만나자는 건 지극히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었다. 그가 우리 독립군을 토벌하는 총책임자의 직위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응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우리가 자진해서 만나야 할 필요에도 당면했었다.“ 이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중국군은 적어도 독립군과 일본군의 대규모 교전은 원치 않는다는 것과 일본군에 의한 독립군의 토벌을 원치 않았다는 말이 된다. 실재 이후에도 중국군과의 마찰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봤을 때 중국군은 일제의 만행을 방관했거나 당시의 정황자체를 회피했다고 봄이 타당할 것이다.

아무튼, 일본군의 대규모병력이 침입하였다는 소식과 함께 화룡지역 이도구, 삼도구 도두구 등지에 일본군이 몰려 있다는 정보는 곧 독립군단체에도 전해졌다. 독립군 입장에서도 이에 따른 통일된 노선의 정리가 필요했다. 각개부대별로 행동했을 시에는 각개격파의 위험성이 그만큼 클 수밖에 없고 이는 일본군이 노리는 바이기도 했다. 같이 싸울 것이냐 말 것이냐를 두고 노선의 통일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북로군정서가 묘령을 지날 무렵 근동에 산재해 있던 제 독립군단체에게 연통이 전달되었고 묘령에서 긴급회합을 갖게 되었다. 이날이 10월 19일이다.

이때 모인 단체는 북로군정서와 홍범도가 지휘하는 연합부대였다. 일제의 기록에 의하면 10월 13일에 ‘하마탕’(蛤蟆塘)에서 국민회, 신민회, 의민단, 한민회 등 4개 단체대표가 회합하여 홍범도를 총지휘관으로 하여 행동통일을 결의한바 있다. 이 연합부대와 북로군정서가 다시 행동 통일을 위해 만난 것이다. 이 회의는 시기적으로 보면 대단히 시의적절한 조치였다. 그러나 거기에서 합의된 내용에 대해서는 평가가 분분하다. 이 회의에 북로군정서에서는 부총재인 현천묵과 이범석, 그리고 김좌진의 비서였던 이정(진중일지 작성자)이 참여했으며 연합부대 측에서는 홍범도, 안무, 계화 등 7명이 참석했다.

빈집이 보이긴 하지만 묘령촌은 아직도 한인동포 마을이다.
빈집이 보이긴 하지만 묘령촌은 아직도 한인동포 마을이다.

김좌진이 참석하지 않았던 것은 현천묵이 이때까지 북로군정서와 함께 있었기 때문으로 보이며, 이때 십리평 일대에 병력을 전개하여 전투준비태세를 유지하고 있었으므로 병력을 통제할 지휘관은 현장에 위치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판단에 기인했을 것이다. 북로군정서 대표로 참석한 세 사람의 걸음은 느렸다. 이범석은 당시의 모습을 이렇게 회상했다. <계속>

김종해

<다시 쓰는 북로아군실전기>
현재 김좌진의 주 활동무대였던 북만주 하이린시에 위치한 한중우의공원 관장으로 재직 중이다. 육군 예비역 대령. 정치학박사로 사관학교 교수 등을 역임. 코로나 발생 전 까지는 젊은 학생들과 함께 일 년에 열 차례 이상 북만주 항일 무쟁 투쟁지 및 고구려 유적지를 답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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