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랑 칼럼]이공대수(以攻代守)

이정랑 중국고전 평론가
이정랑 중국고전 평론가

‘송사(宋史)’ ‘유기전(劉錡傳)’을 보면 이런 일이 기록되어 있다. 1140년, 남송의 유기는 동경(東京.-지금의 개봉) 부유수(副留守)로 임명되어 3만여 명을 이끌고 임안(臨安.-지금의 항주)을 거쳐 동경으로 가서 금나라의 진공을 막게 되었다. 순창(順昌.-지금의 안휘성 부양현)에 이르렀을 때 동경이 이미 함락되었다는 보고를 받게 되었다. 

유기는 순창성을 지켜 금의 남침을 막기로 했다. 그는 일반적인 방어 부서를 설치하는 것 외에도 기계 설비를 징집하여 성 위에다 방어용 활과 같은 시설물을 설치했다. 또 외성(外城.-고대의 성은 흔히 안과 밖에 내성(內城)과 외성이 있다) 밑에 흙 담을 구축하고, 그 위에 적의 동정을 관찰하기에 편리하고 활을 쏘기에도 좋은 구멍을 뚫었다. 성 부근에는 복병을 두어 적을 습격하여 포로를 잡을 수 있도록 준비했다.

6일 후, 적이 접근해오자 유기는 습격을 명령했고 그 결과 적의 진공을 좌절시키고 적장 두 명을 사로잡았다. 적장을 심문한 결과 성에서 30리 떨어진 백사와(白沙窩)에 적의 대군이 주둔하고 있으며, 그날 밤 습격해올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유기는 적을 혼동시킬 목적으로 모든 성문을 열어놓도록 했다. 과연 적군은 매복이 있을 것으로 의심해서 감히 접근하지 못하고 먼 거리에서 활만 쏘아댔다. 유기의 부대는 방어와 활쏘기에 유리한 시설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사상자가 적은 반면 적의 사상자는 매우 많았다. 금군이 퇴각하자 유기는 그 퇴로를 끊어 금의 대부대를 영하(潁河)에 빠뜨려 익사시켰다.

적군은 성에서 20리 떨어진 이촌(李村) 부근으로 퇴각하는 한편, 병력을 증강하여 재차 공격해올 준비를 했었다. 유기는 이런 동정을 눈치채고 ‘한발 앞서 상대를 제압한다’는 ‘선발제인(先發制人)’의 수단을 취하여, 적이 쳐들어오기 전에 용장 염충(閻充)으로 하여 5백 명의 전사를 이끌고 천둥 번개와 비바람이 몰아치는 야밤을 틈타 습격을 가하게 했다. 금군은 다시 중대한 타격을 입고 30리 밖으로 후퇴했다. 이튿날 밤, 유기는 또, 다시 천둥 번개가 치고 비바람이 심한 기상 조건을 이용하여 병사 1백 명을 출전시키기로 했다. 유기는 각 병사들에게 무기를 지니게 하는 외에도 대나무로 만든 호루라기를 하나씩 지참하고 습격에 나서도록 했다. 번개가 번쩍하면 일제히 호루라기를 불어대며 적군을 향해 달려들고 번갯불이 지나가면 일제히 엎드려 움직이지 않도록 하니, 금군은 갈피를 못 잡고 자기편끼리 죽고 죽이는 일대 혼란에 빠졌다. 시체가 곳곳에 널렸고 금군은 다시 멀찌감치 노파만(老婆灣)까지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금군의 최고 사령관 김올술(金兀術)은 몇 차례 잇단 패배 소식을 접하자 몸소 10만 대군을 이끌고 개봉으로부터 지원에 나섰다. 유기는 주력군 간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어야 한다고 판단, 다시 기묘한 전법들을 구사했다. 먼저 두 명의 용사를 골라 전투 중에 일부러 말에서 떨어져 금군의 포로가 되게 했다. 김올술이 이 두 용사를 심문하자, 용사들은 유기를 가리켜 위인이 늘 놀고 마시기만 좋아하고 싸움을 할 줄 모르는 난봉꾼이라고 비난했다. 김올술은 적을 깔보는 교만한 마음을 갖게 되어 유기쯤은 단숨에 쳐부술 수 있다고 자신하게 되었다. 유기는 김올술의 화를 돋우어 자신이 쳐놓은 함정으로 유인할 요량으로 고의로 사람을 보내 김올술을 자극했다.

“김올술, 내가 영하를 건너와 나와 싸울 수 있다면 부교(浮橋.-뜬 다리) 다섯을 설치해 기꺼이 너를 맞이하겠다.”

김올술은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버럭 화를 내며 자신이 발끝만 움직여도 순창성은 금세 함락될 것이라며, 내일 아침 강을 건너겠노라 대답했다. 유기는 정말로 영하 위에 다섯 개의 부교를 설치해 놓았다. 그와 동시에 강 상류와 금군이 강을 건넌 후 점령하게 될 지역 구석구석에 독을 뿌려놓았다. 금군은 강을 건넌 후 대부분 독에 중독되고 말았다. 더구나 날이 무척 더워 무거운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피로와 고통에 시달리니 전군의 사기가 완전히 처지고 말았다. 반면에 유기의 부대는 돌아가며 휴식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기가 왕성했다.

유기는 적이 피곤해 있을 때 공격하는 전형적인 전법을 취했다. 한낮이 되자 금군은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유기는 수백 명을 서문 쪽에서 내보내 크게 고함을 지르며 금군을 향해 돌진케 했다. 금군의 주의력이 서문 쪽으로 집중되자, 이번에는 수천 명이 예리한 칼과 도끼를 들고 남문을 나와 공격했다. 금군은 대패했고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격렬한 전투의 와중에서 김올술이 몸소 이끄는 이른바 ‘철부도(鐵浮圖)’와 ‘괴자마(拐子馬)’ 등 정예 부대도 유기 군대의 공격에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정예군은 열에 일곱 여덟이 희생되었다. 대세를 만회할 길이 없다고 판단한 김올술은 잔병을 이끌고 개봉으로 도주했다.

유기는 승기를 몰아 금군을 추격하여 다시 수만을 섬멸했다. 유기가 지휘한 순창 방위전은 적극적 수단과 상대를 속이는 기발한 계략으로, ‘싸움(공격)으로 지키는 것(수비)을 대신하는’ 계략을 훌륭하게 체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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