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노동기구(ILO)가 매년 개최하는 연차총회가 올해도 여느 해처럼 6월 첫째 주와 둘째 주에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다. ILO의 일상사업을 책임지며 한해 세 번 열리는 이사회는 3월·6월·11월에 개최한다. 그리고 ILO의 ‘결사의 자유’ 협약 87호에 대한 회원국들의 준수 여부를 심사하고 평가하는 결사의 자유위원회 회의는 이사회 개최에 맞춰 세 번 열린다.

올해 ILO가 주관하는 부문별(sector) 회의는 예술 및 오락·항공·농식품·소매·내륙수로 5개 부문을 중심으로 개최된다. 회원국의 노사정 3자 대표로 구성되는 ILO의 부문별 회의는 ILO가 생산한 최신 연구보고서에 근거해 해당 부문, 즉 해당 산업의 동향과 향후 과제를 논의하는 사회적 대화 포럼이다.

부문별 회의에서 이뤄진 합의는 향후 ILO의 해당 부문 관련 정책과 권고에 반영된다. 단기적으로는 회원국 정부의 정책과 사업에, 중장기적으로는 향후 채택될 국제기준의 지침으로 기능하게 된다.

2023년 ILO는 다양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 직접적으로는 우크라이나 전쟁과 미국과 중국의 충돌이 ILO를 비롯한 국제연합(UN) 산하 국제기구들의 정상적인 작동을 마비시키고 있다. 세계무역기구(WTO)에 대한 미국의 사보타지에서 드러나듯이, 유엔 기구들의 기능이 마비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미국의 비협조와 자국중심주의 때문이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동진에 반발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계기로 ILO의 가장 강력한 지지세력인 유럽연합(EU)이 ‘사회적 유럽(Social Europe)’의 꿈을 버리고 ‘군사적 유럽(Militaristic Europe)’으로 변질되는 것도 우려스러운 상황이다.

이러한 국제 정세의 우경화와 군사화는 노동자의 권리와 이익을 보장함으로써 사회정의를 실현해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구축한다는 비전을 갖고 1919년 출범한 ILO의 앞길에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1960년대 말까지 ILO는 노동자의 권리와 이익에 초점을 맞춘 활동을 전개해 왔다. 하지만 ILO의 ‘친노동자성’ 기준에 대한 지지를 거부해 온 미국은 1970년대 들어 ILO가 3세계 국가들을 등에 업고 반미적인 정책을 전개한다는 이유로 ILO에서 탈퇴했다.

가장 큰 재정 기여국인 미국의 탈퇴로 ILO는 그 운영과 사업에서 지대한 타격을 입었다. 미국의 요구를 수용해 자신의 정책기조를 노동자의 권리와 이익이라는 ‘노동문제(labour questions)’에서 일자리 중심의 ‘고용문제(employment issues)’로 축소시키는 타협책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1998년 이후 ILO의 중심 정책이 된 ‘괜찮은 일자리(Decent Work)’가 탄생하게 된 역사적 배경이다.

1919년 11월 창설 당시 ILO가 천명한 목표가 “노동기준 확립을 통한 사회정의의 실현과 항구적 평화달성”이었다는 사실과, 1944년 5월 채택한 필라델피아선언의 핵심 슬로건이 “노동은 상품이 아니다”였다는 점을 상기할 때, “창피하지 않은 수준의 일자리”라는 소극적 의미를 갖는 ‘괜찮은 일자리(decent work)’라는 정책 목표는 솔직히 말해 앙상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글로벌 공급 사슬 해체와 국제적 경제블록화라는 작금의 도전 앞에서 신자유주의의 첨병이라고 불렸던 세계무역기구(WTO)·국제통화기금(IMF)·세계은행도 찬밥 신세로 전락하는 상황에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질주를 규제하는 브레이크 역할을 했던 ILO의 기능과 역할도 축소될 것이 자명해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노사정 3자 기구인 ILO의 한 축으로 글로벌 노사정 3자 체제에서 노동을 대표해 ‘왼쪽 날개’의 역할을 담당해야 할 국제노총(ITUC)이 신임 사무총장의 뇌물 혐의 문제로 새 집행부가 임기를 시작하기 전부터 기능 마비 상태에 빠진 사태는 상징적이다.

이런 와중에 발표된 ILO의 2023년 회의 일정은 형식상으로는 여느 해와 비슷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지만, 그 내용에서는 여느 해와 다른 역사적 의미를 갖게 될 것으로 보인다. 해체되고 있는 현행 국제질서체제를 대체할 새로운 대안을 ILO가 마련할 것으로 보는 것은 과도한 기대일 것이다. 향후 격변할 세계에서 새로운 글로벌 노동체제는 어떠한 모습을 띠게 될 것인가. 우리가 알고 있던 세계의 종언을 목도하고 있는 지금 노동문제 역시 역동적이면서도 불확실한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

윤효원 객원기자 (webmaster@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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