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세습왕조 악행에 대한 준엄한 심판”
“위안부 사건 없었으면 이번 사건 이기기 힘들었을 것”
“역사를 바로잡고 정의를 바로 세워야 한다”

김현 변호사
김현 변호사

[일요서울 | 오두환 기자] 지난 7월 7일 서울중앙지법 민사47단독 김영아 판사는 국군포로 출신 한모(86)씨와 노모씨가 북한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했다. 김 판사는 북한과 김 위원장이 공동해 한씨와 노씨에게 각 2100만원씩 지급하라고 판단했다. 한씨와 노씨는 한국전쟁 당시 북한에 억류돼 강제노역한 탈북 국군포로다.

이날 판결은 북한과 김 위원장을 상대로 제기된 최초의 손해배상 소송으로 승소 판결까지 이어졌다. 일요서울은 소송을 이끈 법무법인 ‘세창’의 김현 대표변호사(전 대한변호사협회장)를 지난 8일 만났다.

다음은 김현 변호사와 나눈 일문일답이다.

- ‘김정은 상대 손배소’ 국내 최초 승소인데.

▲정말 기쁘다. 자유 대한민국의 승리다. 제가 존경하는 사법부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그리고 지난 5년간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 굉장히 보람을 느낀다. 앞으로도 이런 옳은 길 특히 저는 대한민국의 가치는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고 법치주의를 지키는 것이 대한민국의 가장 소중한 가치라고 생각한다. 이번 판결이야말로 국군포로들이 50년간 강제노역을 억울하게 당했는데 거기에 대한 명예 회복, 그리고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세습왕조의 악행, 내지 불법행위에 대한 준엄한 심판이다. 그리고 북한과 독재자 김정은을 우리나라 법정에 세워 책임을 묻고 준엄하게 심판한 최초의 케이스다. 아주 뜻 깊게 생각한다.

- 승소 예상했나.

▲한 70% 정도 예상했다. 2016년에 제기했는데 3년간 전혀 진전이 없었다. 그럼 그렇지, 대한민국 법원이 그렇게 쉽게 인정해 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벽이 강고하다. 저는 물망초 활동을 10년 했다. 물망초 국군포로 송환위원장은 2013년부터 2017년까지 4년을 했다. 그러면서 국군포로들을 수없이 만났고 그분들을 모시고 국정원에 초대 받아서 두 번이나 가서 오찬을 참석했다. 국군포로를 송환해야 한다는 목표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 소송을 제기했는데 진전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2019년에 법원에서 굉장히 적극적으로 진행을 했다. 그 뒤에는 김도현 부장판사가 있었다. 새로 부임해서 문제의식을 갖고 이 사건을 적극적으로 진행시켰다.

제일 큰 관문은 북한에 대해 송달을 어떻게 하느냐 그게 문제였다.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냈다. 중국에 있는 북한 대사관에 송달하면 어떨까. 그런데 법원이, 물론 저의 제안이었지만 공시송달을 해 보자 이런 제안을 했다.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김도현 부장판사가 받아들였다. 공시송달을 했다. ‘공시송달’이라는 것은 피고의 주소를 모르거나 송달할 수 없을 때 하는 조치인데 이걸 북한에 적용한다는 건 김동연 부장판사의 용단이었다. 그래서 송달되고 급진전됐다.

그동안 7번의 재판이 있었는데 재판장이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여러 가지 이슈에 대해서 치열하게 몰아붙였다.

- 원고가 국군포로라는 것은 어떻게 입증했나.

▲동료 국군포로들의 증언, 국군포로의 딸 그분은 북한에서 돌아가셨다. 한 분은 전쟁 중 사망으로 돼 있었다. 잘못된 거다. 그래서 그걸 바로잡았다. 국방부에서 전역식까지 해 줬다. 한 분은 2000년 탈북했고 또 한 분은 2001년 탈북해서 전역식을 했다. 그 기록은 있다. 그걸 제출해서 국군포로라는 걸 입증했다. 현지에서 국군포로였다는 것은 여러 자료가 많았다. 서적, 증언 등. 그래서 그걸 간접 증거로 제출했다.

- 가장 어려운 게 과거의 사실을 증명하는 것인데, 국정원, 통일부, 국방부에서 도와주지 않으면 증거 찾기가 힘들지 않나.

▲우리 정부는 정말 잘못됐다. 미국 같은 경우 6.25 전쟁 때 사망한 군인들의 유해를 다 발굴한다. 감식단이 가서 발굴하고 북한에 한 구당 200만 원씩 준다. 그러니까 북한이 탐나니까 준다. 그러다가 조사해 보니까 이들이 카투사였다. 그걸 우리한테 보내줬다. 얼마 전에 돌아온 29구 그게 바로 미국이 한 거다. 우리 정부가 한 게 아니다. 생색은 대통령이 냈다. 마치 자기가 한 것처럼. 너무 분통터지는 일이다.

- 탈북 국군포로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나.

▲아버지가 함경북도 종성 출신의 실향민이다. 어머니도 황해도 출신의 실향민이다. 그래서 북한에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다. 그러다가 2007년 대한변협 북한인권소위 위원장을 맞게 됐다. 그때 북한인권백서를 민간에서 최초로 냈다. 그때 탈북자 100명을 인터뷰했다. 그랬더니 95%가 함경북도 출신이더라. 그래서 탈북자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됐고 그러다가 물망초가 2010년에 생기고 이사를 맡게 되면서 처음부터 관여했다. 그리고 국군포로송환위원장을 맡게 됐다. 그래서 국군포로들을 많이 만나게 됐고 그분들과 친하게 됐다. 그러다가 ‘우리 어르신 억울하잖아요. 강제노역 당한 거. 우리 소송 한번 해 봅시다’ 그런 얘기를 박 이사장과 저와 국군포로 두분이 의기투합해 소송을 하게 됐다.

- 소송을 준비하는 동안 가장 어려웠던 점은.

▲변호사는 승소하는 게 가장 큰 보람인데 재판과정에서 법원과의 치열한 법리다툼이 제일 힘들었다. 법원은 자꾸만 객관적인 입장에서 입증을 하라고 하는데 쉽지 않았다. 그래서 아주 고심하고 고뇌를 거듭했다. 그게 제일 힘들었다.

- 과거에도 이런 소송 사례가 있었나.

▲없었다. 내가 아는 한 최초의 소송이었다.

- 간단히 소송내용을 설명한다면.

▲원고 두 어른신 한모 어르신, 1934년생인데 이분은 1950년에 자원입대했다. 그러다가 1년 만에 중공군의 불시 습격으로 포로가 됐다. 그때부터 북한에 끌려가서 강제노동을 했다. 1953년까지 탄광에서 아주 험한 인격적인 모독을 받아가면서 밥도 제대로 못 먹고 강제노역을 했다. 그러다가 정전이 됐는데 돌려보내지 않았다. 강제 억류를 시켰다. 그리고 형식적으로 북한 공민권을 줬지만 그다음부터 온갖 인간적인 멸시를 받고 노동을 하며 먹고 살아야 했다. 월급은 쥐꼬리만큼 줬다. 그러다가 2000년도에 탈북했다. 무려 50년 청춘을 북한에서 바쳤다.

노모 어르신도 마찬가지다. 이분도 역시 1953년에 포로가 돼서 정전협정 위반으로 북한에 억류돼서 강제 노동을 하고 2001년 탈북할 때까지 온갖 비인간적인 학대를 받았다.

김일성이 그걸 주도한거다. 40년간 정전협정을 위반하고 국군포로 8만 명을 돌려보내지 않았다. 그 아들 김정일도 7년간 똑같은 일을 했다. 그러다가 김정은이 상속하게 된 거다. 우리 주장은 원고들한테 저지른 불법행위를 김일성이 책임지고 김일성이 죽었으면 상속권을 김정일이 책임지고 김정일이 죽었으면 역시 불법행위 채무가 김정은한테 상속된다. 그래서 김정은은 상속받은 불법행위 채무자가 된다.

북한 역시 반국가단체로서 이런 악행을 저질렀으니까 김정은과 연대해서 둘이 공동으로 책임져라. 이게 소송내용이다.

- 손해배상금이 한 명당 2100만 원이다. 너무 적지 않은가.

▲적다. 1인당 6억 원을 청구했다. 그중에 47년간, 김일성은 40년간 북한을 지배했고 김정일은 7년간만 지배했다. 그래서 김일성한테는 47분의 40을 청구해서 5억 1000만 원 책임을 물었다. 김정일은 나머지 9000만 원만 책임을 물었다. 그리고 김일성의 채무가 약 15분의 1, 자녀이 5명이고 부인이 있어서. 부인이 1.5 자녀는 1이다. 상속비율 13분의 2를 김정일이 책임 지도록 했다. 계산하니까 7800만 원이 나왔다. 또 김정일 스스로 책임 9000만 원 더하니까 1억6800만 원이 나왔다. 김정일이 또 자녀가 6명이다. 그걸 15분의 2로 하니까 2200만 원이 나왔다.

그런데 소장을 낼 때 원래 2100만 원씩 청구했다. 그래서 굳이 100만 원 늘리기 그래서 소장 청구대로 청구했는데 전부 받아들여졌다.

- 이번 승소로 인해 집단소송 가능성이 열렸는데.

▲할 거다. 물망초 국군포로 송환위원회가 살아있는 국군포로가 23명인데 21명한테 의사를 물어 볼 거다. 아마 대개다 할 거다. 그리고 돌아가신 57명, 탈북 국군포로가 80명이다. 돌아가신 57명의 유족들도 청구할 수 있다. 그분들한테도 의사를 물어 볼 거다. 아마 78명의 생존자 및 유족들이 대거 소송을 낼 거다.

- 탈북 국군포로 손배소 관련 아이디어 어디서 착안했나.

▲영감을 얻은 것이 위안부 사건이다. 굉장히 오래됐는데 대한민국 법원에서 인정을 했다. 일제강점기 때는 소송을 제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지금 제기하는 것이다. 그 논리를 빌렸다. 재판장도 그 소송에서 힌트를 얻었을 거다.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는 소송, 그런 일관된 흐름이다. 아마 위안부 사건이 없었으면 이번 사건 이기기 힘들었을 것이다. 거기다 분위기상 오토 웜비어 사건이 터졌다. 역시 최근에 북한 정권이 저지른 악행으로 인해 고문사한 분의 부모들이 미국 법원에 북한 정권을 상대로 제소해서 이겼다. 그게 큰 영향을 미쳤다.

- 재판 승소가 남북관계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 같은데.

▲건전한 남북관계는 책임질 것은 책임지고 화해할 것은 화해하고 협조할 것은 협조하는 거다. 과거의 악행을 다 덮어놓고 앞으로 좋은 얘기만 하자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역사를 바로잡아야 한다 정의를 바로 세워야 한다. 국군포로들이 신음하고 50년간 청춘을 바쳤는데 아무런 대가가 없다? 우리 후손들도 잃어버리고 북한과 잘 지내겠다? 그건 위선이고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 두 원고는 승소 후 어떤 말 했나.

▲굉장히 감격스럽게 생각한다. 이제 명예를 회복했다고 생각한다. 그분들은 항상 우리가 돈 몇 푼 받자고 하는 게 아니다, 젊은 우리가 바친 청춘과 명예를 회복하고 싶다, 국군포로로 50년간 북한에서 인간 대접을 못 받고 대한민국에 돌아왔다, 그 시간을 보상받고 싶다고 했다.

- 손해배상금 2100만 원 어떻게 회수하게 되나.

▲2008년 임종석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주도해서 북한경제문화협력단을 만들었다. 그래서 조선중앙티비가 가진 저작권에 대해서 저작료를 징수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언론단체가 조선중앙티비를 인용하면 돈을 내야 한다. 그래서 실제로 8억 원을 송금했다. 그러다 2008년에 박왕자 사건이 터졌다. 그때부터 정부가 더 이상 송금은 안 된다고 하고 금지했다. 그때부터는 저작권료를 법원에 공탁을 했다. 그게 한 20억 원이 된다. 그건 북한 재산이다. 그걸 서울중앙지법이 가지고 있다. 우리가 판결을 받았으니까 압류 및 추심명령을 법원으로부터 받아서 그 돈을 지급하라 할 거다.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