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관 오럴 히스토리] - 공로명 편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사진 [뉴시스]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사진 [뉴시스]

 

[일요서울 | 황기현 기자] 국립외교원 외교사연구센터에서 ‘외교’라는 렌즈를 통해 우리 현대사를 조명하기 위해 오럴히스토리사업 ‘한국 외교와 외교관’ 도서 출판을 진행해 왔다. 지금까지 총 17권의 책이 발간됐다. 일요서울은 그중 공로명 전 외교부장관의 이야기가 담긴 책의 내용 중 일부를 지면으로 옮겼다.

“정부로부터 받은 정리대상자 명단 보는데 기가 막히더라”
“이집트에 한국 학교 세운 것 기억에 남는다”

▲ 북한은 1963년 8월 영사관계를 수립하고 2년 후에 외교관계를 맺었는데, 우린 그때 북한하고 외교관계를 맺은 나라와는 외교관계를 맺지 않는다는 할슈타인 독트린을 지키기 위해서 당시에 이집트의 제의를 거절했다. 그러다가 그 후에 외교관계로 격상시키려고 생각을 했는데, 1973년 10월에 제4차 중동전쟁이 일어난다. 이집트에서는 이를 라마단전쟁이라고 한다. 이때 처음으로 이스라엘에 반쪽 승리를 하게 되는데, 그 전승기념을 대대적으로 축하한다. 아시다시피 1981년 전승기념일 기념식장에서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이 암살된다. 이 제4차 중동전쟁 때 북한이 전투조종사를 파견해서 참전을 했다. 당시 공군참모총장이던 호스니 무바라크는 후에 이집트 대통령이 되고 아랍의 봄때 실각을 한다.
그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이 우리 측의 외교관계 승격 제의에 대해서 일절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1995년 4월 13일에 이집트와 수교를 하게 된다. 김일성이 사망을 하니까 인간적인 의리가 끝났다는 거다. 호스니 무바라크는 1980·1983·1985·1990년, 전후 4차례에 걸쳐서 북한을 방문한다. 북한과 호스니 무바라크의 끈끈한 관계 때문에 우리가 외교관계를 맺을 수 없어서 총영사관으로서 기능을 햇었다. 따라서 우리는 자연히 이집트와 경제·무역·통상 분야에만 중점을 두게 됐다. 실질적으로 레바논 사태 이후에 카이로가 중동 시장의 거점 역할을 하고 있어서, 우리나라 상사 12~13곳 정도가 카이로에 주재하고 있었다. 그래서 제가 부임하던 1979년 우리 수출이 8500만 달러, 수입이 645만 달러였고, 이듬해 1980년에는 우리 수출이 1억500만 달러, 수입은 3100만 달러가 된다. 이렇게 경제관계가 발전하고 있었다. 특히 진출한 기업 가운데는 동산토건, 지금은 어딘가.

- 두산이다.

▲ 그렇다. 두산건설의 전신이다. 우리나라 상공회의소가 이집트 상공회의소와 업무협력·제휴관계를 가지고 있어서 1976년에 경제협력관계를 갖는 의정서를 체결하고, 제가 부임한 1979년에 첫 한·이집트 경제협력위원회가 열려서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되기 바로 전날 첫 회의를 하고 다음 날 우리 대표단이 떠나는 일정으로 갔다. 그리고 외환은행이 현지법인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IMF 사태 때 현지은행을 팔았다는 얘길 들었는데, 따라서 지금은 없다.
그리고 한 가지 놀라운 이야기라고 할까, 우리 국민들의 교육 수준이 얼마나 높은지를 이집트사회에 보여준 일이 있었다. 우리가 한국의 날 행사를 했다. 사실 당시 카이로에 머무는 교포가 100명 조금 넘는 정도였는데, 그 부인들이 합창단을 만들어서 한국 노래를 불렀다. 그래서 이집트 현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와 있기에 합창단까지 만들 수 있느냐고 놀라워했다.
또 하나는 제가 본국에 건의를 해서 만든 한국학교가 있다. 이 한국학교는 우리 교육부의 정식 인가를 받은 해외 주재 학교다. 우리 공관직원들 아이들이 유치원에 갈 나이가 됐는데 유치원에 갈 수가 없는 거다. 그런데 다른 지역 공관 직원들이나 상사 직원들은 본국 회사의 지원을 받아서 아메리칸스쿨을 보낸다. 그런데 그때만 해도 자녀들에 대한 학비보조가 없어서 공관 직원 아이들은 갈 수가 없으니까 집에서 놀고 있는 거다. 그래서 학교를 만들어달라고 본국 정부에 요청했더니 다행히 본국 정부에서 현지 사정을 알고 초등학교 설립을 인가했다. 아직도 잘 운영되고 있다는 얘길 들었는데, 그거 하나는 특기할 만한 사항일 거다. 관저 지하실에 교실 한두어 개를 만들 수가 있어서 거기서부터 시작한 학교다. 요새는 독립된 교사가 있다.

- 1981년 1월 차관보로 부임하셔서 제5공화국 초기 우리 외교에 깊이 관여를 하셨다. 그 당시 국내에서는 10·26사태 이후에 12·12사태, 5·18민주화운동 등을 거쳐서 전두환 정권이 안정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고 본다. 미국에서는 로널드 레이건 정권이 출범하고, 급속히 한·미 관계도 좋아지는 시기였다. 우선 1981년 1월에 전두환 대통령의 방미 관련한 이야기를 말씀해주셨으면 한다.

▲ 1979년에 카이로에 부임을 하고 몇 달 안 되어 10·26사태를 겪었다. 사실 7월에 한국 떠날 때 박정희 대통령께서 일부러 저를 청와대에 부르셔서 카이로로 간다니까 격려해주셨는데, 대통령께서 돌아가셨다고 하니까 믿어지지 않았지만 현실은 현실이다. 그런 냉혹하고 냉엄한 현실이 닥쳤다. 그래서 1980년 들어와서 국내에서는 광주민주화운동도 일어나고, 동시에 전두환 대통령이 1980년 가을에 장충단에서 소위 간접선거를 통해 대통령으로 피선되고 취임하는 변화가 있었다. 그래서 크리스마스 전후한 휴가를 이용해서 저는 이스라엘을 방문하려고 계획을 했다. 이스라엘대사관에 찾아가서 비자를 받고 준비하고 있었는데, 갑작스럽게 정무차관보로 발령됐다고 즉시 본국으로 들어오라는 전보를 받았다. 그래서 부랴부랴 임지를 떠나야 했다. 마침 크리스마스 때 리셉션을 개최하려고 손님들을 초대했기 때문에 그 크리스마스 리셉션이 제 이임인사가 됐다. 그렇게 바로 떠나서 가장 최단 시일 내에 서울에 도착한다고 한 게 1월 3일이다. 1월 3일 서울에 도착해서 다음 날인 1월 4일 업무 개시일에 맞춰서 출근을 했다.

- 갑자기 발령을 받게 되셨다.

▲ 그렇다. 당시 외무부에 닥친 일이 두 가지가 있었다. 한 가지는 노신영 장관이 1980년대 가을에 외무부장관으로 부임을 해서 당시에 정부로부터 받은 정리대상자 명단이 있다. 외교관들을 고과에 따라서 정리하겠다는 명부였다. 그 명부를 장관이 보여주시는데 거기에 적혀 있는 사람들이 한 60여 명이 되는데 참 기가 막히더라. 우수한 직원이라고 평가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재외공관 근무 시에 무관들하고 잘못 사귄 사람들이 괘씸죄에 걸려서 들어 있던 거다. 이 사항은 노신영 장관께서 쓰신 회고록에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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