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민 논산계룡교육지원청학교폭력심의위원장

최영민 학교폭력심의위원장
최영민 학교폭력심의위원장

미국에서 아시아인 혐오범죄가 계속 발생하고 있다. 아시아인들은 길을 걷다가, 버스 안에서, 지하철역에서 단지 아시아인이라는 이유로 욕설과 폭행을 당하고 있고, 그 피해자 중 다수가 여성이라는 사실에 더 심각성을 느낀다. 최근 이런 혐오범죄에 대한 일련의 뉴스를 보고 몇 가지 생각을 적어본다.

우선 흑백갈등이 주를 이뤘던 미국사회에 아시아인 혐오는 인종차별 양태가 언제든지, 어떤 계기로든 다른 형태의 혐오(여성혐오, 외국인노동자혐오, 재난희생자혐오 등)와 범죄의 위험성을 안고 있다는 것, 인종 차별은 민족, 신분 계급 성별에 기반한 차별과 착종관계에 있으며 정치적 사회적 신체적 약자를 향한 다는 것, 지금까지 인류가 쌓아온 평등과 인권의 지평들이 매우 협소하다는 것, 백인, 흑인, 여성, 남성 등등 어떤 집단에 속하는 사람들의 고유한 정체성은 객관적 실체가 아니라 중단과 상실을 내재하고 있는 현상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아델베르트 폰 사미소의 소설 <그림자를 판 사나이>는 사람됨의 중단과 소외에 관한 짧은 이야기다. 주인공 슐레밀은 어느 날 파티장에서 우연히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를 만난다. 남자는 슐레밀의 그림자가 너무 멋지다고 말하며 금을 무한하게 만들어내는 ‘행운의 자루’를 보여주고 그림자와 바꾸자고 제안한다. 유혹을 참지 못한 슐레밀은 자신의 그림자를 주고 자루를 받는다. 이후 아무 쓸모도 없을 것 같던 ‘그림자’의 사라짐은 슐레밀의 삶에 진짜 그림자를 드리운다. 이웃 사람들은 그림자 없는 슐레밀을 공동체 구성원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림자도 없는 주제에 햇빛에 돌아다니지 말라는 충고를 하고 무시한다. 슐레밀이 엄청난 부자여도 그림자 없는 사람과는 결혼시킬 수 없다는 신부 가족의 반대로 결혼도 실패한다. 신체도 아니고 그림자가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 중요한 것은 사람으로 인정받기 위해 필요한 ‘그 무엇’이 아니라 “우리를 사람으로 인정하는 사람들이 있는 공간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더 이상 사람이 아니게 된다.”(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는 통찰이다.

혐오의 대표적인 언사인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 “여기서 떠나라”는 말은 여기는 네 나라가 아니고, 네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공격과 배제의 이중메시지를 전달한다. 나라, 국가, 국민의 의미가 민족이나 인종과는 별개로 일정 지역 내 거주하는 사람들을 뜻하지만 돌아가기를 종용받는 사람들에게 ‘너희 나라’는 인종과 민족 규범이고, ‘떠나라’는 있을 곳, 머무를 곳, 곧 같은 장소 사용에 대한 거부의 의미다. 낙인과 배제의 장치는 언제나 공간의 문제인데 흑인이 아프리카를 떠나 아메리카 대륙으로 들어선 순간 노예가 되었고, 1965년까지 미국 남부 11개 주에서 시행됐던 짐크로우법 핵심이 ‘공공시설에서 백인과 유색 인종 분리’를 골자로 하고 있다는 것도 보편적이고 가시적인 공간과 공간 점유의 문제가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장소와 사회적 성원권에 대한 탁월한 지각을 갖고 있는 김현경은 “성원권의 문제는 분류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의 문제며, 인식론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학의 문제”라고 했다. 연결해서 생각해보면 2차 대전 나치의 유대인 학살,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등 20세기 인류가 겪은 제노사이드 역시 사회경제적 위기와 연동되어 있고, 편견 혐오 차별 증오의 확증편향과 인간에 내재한 평범한 악의 문제가 무섭게 결탁한 결과다.

근대 사회 이전에 차별은 핏줄과 계급 문제였다면 오늘날 차별과 배제의 양태는 인종차별만이 아니라 민족, 피부색, 외국인, 장애, 종교, 지역, 나이, 학벌, 학력, 젠더, 섹슈얼리티 등등 세분화되고 촘촘하게 얽혀 있다. 누구나 소수자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소수자는 소수에 해당하는 사람이 아니다. 차별과 인권 침해 노출 가능성이 높아지면 누구나 소수자가 될 수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소수와 다수를 구분하는 폭력에 노출 될 수 있다. 따라서 정체성이 고정되어 있는 실체가 아닌 것처럼 차별과 배제도 사회적 상황에 따라 구성되기 때문에 소수와 다수의 변주 가능성에 예민해져야 한다. 흑인페미니즘운동은 기존 페미니즘이 백인 중산층 여성 중심의 운동이었다는 비판과 자각 속에서 젠더와 인종, 계급의 차이를 인식하고 드러냈듯이 ‘나는 누구일까’라는 질문에 해답은 내가 맺고 있는 관계와 위치성을 알아야 가능하다. 심리상담에서 ‘어떻게 지내십니까’보다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질문이 내담자의 심리적 위치를 확인하는 유효한 질문이듯 “나는 어느 위치에서 바라보는가?” 자신의 위치성을 확인하는 근면과 겸손의 GPS를 항상 켜고 살아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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