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도조 이삼평 비가 보이는 언덕길에 세워진 '도조 이삼평 비' 안내문을 계속하여 읽는다.  

도조 이삼평비. 사진=김세곤 제공
도조 이삼평비. 사진=김세곤 제공

“아리타 도자기의 시조인 이삼평공은 ... 처음에는 참모인 다쿠 야스즈미에게 맡겨져 오기군 다쿠 마을에 살며 손에 익힌 기술로 도자기 가마를 이루었으나, 양질의 백토를 구하지 못해 영내 각지를 찾아 돌아다녔다고 한다. 

1616년경 마쓰우라군 아리타 마을의 미다이바시에 가마를 짖고 드디어 이즈미야마에서 최상급의 원료가 되는 백자광을 발견하자 가미시라카와로 옮겨 살며 순백색의 자기를 만들어 냈다. 이것이 일본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백자 도자기가 소성된 유래라고 전해지고 있다.

그 후 이 제조기술은 수 많은 도공들에 의해 면면히 계승되어 아리타 도자기의 오늘의 번영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며 이삼평공은 아리타 도자기의 시조일 뿐만 아니라 일본의 요업계의 대 은인이다. 

오늘날도 도자기 관련 업종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은 이 선인이 남긴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하며, 그 공적을 높이 받들어 존경하고 있다.

여기에 2005년 한일 우정의 해를 기념하여 한일 양 국민의 진정한 아해와 우호친선이 더 한층 발전하는 동시에 이 뜻 깊은 교류의 역사가 영원히 후세에 전해지기를 기원한다. 
-2005년 7월 길일  이삼평공 헌장위원회"

이삼평이 아리타 도자기의 시조일 뿐만 아니라 일본 요업계의 대은인이라고 현창한 것은 뜻깊다. 그런데 비 끝 부분의 ‘헌장위원회’는 ‘현창위원회’를 잘못 번역한 것 같다.   

이윽고 비탈길을 조금 걸으니 ‘도조 이삼평 비’가 있다. 비는 계단을 오르면 있는데 ‘오벨리스크’ 모양이다. 비 옆면에는 나베시마 가문 12대 당주인 종 3위(후작) 나베시마 나오미츠가 글씨를 썼다고 적혀 있다.  

도조 이삼평비. 사진=김세곤 제공
도조 이삼평비. 사진=김세곤 제공
이삼평비 옆면. 사진=김세곤 제공
이삼평비 옆면. 사진=김세곤 제공

일제 강점기에 이삼평 비를 세운다는 것은 반대가 많았단다. 하지만   아리타 주민들과 나베시마 후손들은 송덕회를 조직하고, 명예 총재로 사가현 출신으로 와세다 대학을 창립하고 8대와 17대 일본 총리를 한 오쿠마 시게노부(1838~1922)를 추대했다. 이러자 순식간에 거액의 기부금이 모였고, 기념비 건림도 순조로웠단다.  

이처럼 조선에서 강압적인 헌병통치가 행해진 일제강점기에 ‘이삼평’이란 조선 이름의 비를 세운 것은 매우 파격적인 일이었다. 

도조 언덕에서 아리타 시내를 바라보았다. 산비탈에는 심천제자(深川製磁)라고 적힌 광고판이 있다. 아리타에서 가장 유명한 도자기 회사인 ‘후카가와 도자기 회사’ 광고판이다. 이 회사는 유럽에 도자기를 수출하고 있고, 지금은 천황가에 납품하고 있단다. 

도조 언덕에서 내려다본 아리타 마을. 사진=김세곤 제공
도조 언덕에서 내려다본 아리타 마을. 사진=김세곤 제공

도조 언덕을 내려와 아리타 마을을 구경하였다. 마을은 한가하다. 도자기 상점들이 여기저기에 있다. 

아리타 마을 안내판. 사진=김세곤 제공
아리타 마을 안내판. 사진=김세곤 제공
아리타 마을 전경. 사진=김세곤 제공
아리타 마을 전경. 사진=김세곤 제공
아리타 마을 안내도(아리타, 일본 자기 발상지라고 적혀있다). 사진=김세곤 제공
아리타 마을 안내도(아리타, 일본 자기 발상지라고 적혀있다). 사진=김세곤 제공

그런데 이삼평 도자기는 가업(家業)이 끊어졌다고 한다. 이삼평의 가업은 5대까지 이어지다가 12대까지 근 200년간 끊어졌다. 그러다가 13대가 열차 기관사를 정년하고서 가마를 열어 14대까지 이어지고 있는데 그리 유명하지 않다. 안타까운 일이다. 

한편 정유재란 때 남원에서 가고시마로 끌려온 도공 심당길의 후손은 가업을 계속 이어받아 15대째 이어지고 있다. 특히 14대 심수관(본명 심해길) 일본을 대표하는 역사소설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 1923~1996)의 '어찌 고향을 잊으랴'라는 작품의 주인공이 되었는데 국영 NHK TV는 이 소설을 토대로 8시간짜리 특집 프로그램을 만들었고 그 바람에 심수관 도자기는 일본 전역에서 명품으로 대접받게 되었다. 

이윽고 일행들은 아리타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포쉐린 파크를 구경했다. 독일의 쯔빙거 궁전을 본 따서 만든 파크이다. 향란사에 들어가서 도자기를 구경했다. 화려하고 좋다. 필자도 찻잔 6개를 6만 원에 구입했다.   

포쉐린 파크. 사진=김세곤 제공
포쉐린 파크. 사진=김세곤 제공
향란사 입구. 사진=김세곤 제공
향란사 입구. 사진=김세곤 제공
향란사 내부. 사진=김세곤 제공
향란사 내부. 사진=김세곤 제공

아리타 도자기는 1650년부터 나가사키를 통해 유럽으로 대량 수출되었다. 유럽의 왕실과 귀족들은 이 도자기에 매료되었고 독일 작센주의 선제후였던 아우구스트 2세는 아리타 자기를 참조해 작센의 드레스텐 지역에서 도자기 생산을 시도하기도 했다. 아리타 도자기는 1867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출품하여 최고 영예인 그랑프리 트로피를 받았고, 1873년 비엔나 엑스포에서도 인기였다. 1876년엔 향란사 제품이 필리델피아 박람회에 참가하여 영예 대상을 수상하였다. 이렇게 아리타에서 꽃 핀 도자기의 400년 전통을 지키고 갈고 닦아오면서 젊은 작가들과 크고 작은 공방들이 의욕 있게 작품을 만들어 내고 있다.  

이삼평 조각상 (이즈이야마 자석장 근처 석장신사 옆 건물에 있다). 사진=김세곤 제공
이삼평 조각상 (이즈이야마 자석장 근처 석장신사 옆 건물에 있다). 사진=김세곤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