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오용 한국가이드스타 상임이사.
권오용 한국가이드스타 상임이사.

현대그룹의 창업주 정주영 회장과 한진 창업주 조중훈 회장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전경련 회장단 회의에서 언쟁을 벌이다 격분한 조회장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린 적도 있었다. 한진해운은 현대가 아닌 일본 업체에 화물선 건조를 맡기기도 했고 현대는 중동으로의 근로자 송출에 대한항공(KAL)을 쓰지 못하게도 했다.

두 사람을 하나로 엮어 준 것은 서울 올림픽 유치라는 국가적 대사였다. 서울 올림픽 유치 위원장이었던 정회장은 회고록에서 한⋅불 경협위원장으로서 조회장의 기여를 높이 샀고 조회장은 정회장을 초대해 나란히 산업 시찰을 다니기도 했다. 국가가 필요로 하는 일에서는 기업의 이익이나 총수 개인의 사적인 감정이 우선할 수가 없는 것은 한국 재계의 오랜 전통이자 미덕이었다. 

바이든 대통령이 지난 주 한국을 방문했다. 2박3일의 일정 중 첫날 삼성전자를 찾아 이재용 부회장을 만났고 마지막 날에는 현대 자동차의 정의선 회장을 만났다. 삼성전자에서는 “생큐”를 연발했고 정의선 회장에게는 실망시키지 않겠다는 덕담을 하기도 했다. 한국 방문에 이어진 일본 체류 중 바이든이 도요타를 찾아 갔다거나 기업인 누구와 만났다는 보도가 없는 걸로 봐서는 한국에서 미국 대통령의 행보는 분명 이례적이었다.

한국기업의 무엇이 세계의 최고 권력자인 미국대통령의 일정을 빼내고, 경제안보동맹의 최전선에 나서게끔 했을까? 높은 기술력, 뛰어난 마케팅 능력, 과감한 투자 전략 등 한국 기업들의 강점을 우선 꼽을 수는 있으나 이것만으로는 한국 기업들 특유의 공동체 정신과 연대의식을 설명할 수가 없다. 

한국에서 기업들이 커 나가게 된 것은 1960년대 경제개발이 본격화되면서부터 였다. 기업의 창업주들은 처음부터 나라와 기업을 하나로 해서 발전을 추구했다. 전략이 아니라 생각이 그랬다. 그래서 삼성 창업주 이병철은 “호암자전”에서 “나라가 잘 되면 삼성은 망해도 좋다.”고 했다. 현대중공업의 담장과 지붕에는 “나라가 잘 되는 것이 우리가 잘 되는 것이며 우리가 잘 되는 것이 나라가 잘 되는 길이다.”라고 쓰여있었다. 선경(현SK) 최종현 회장의 못다 쓴 마지막 유고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가 되는 방법”이었다. 포항제철을 짓던 박태준은 “선조들의 피의 대가”라고도 했다. 그래서 한국 기업들은 나라를 위해서는 뭉쳤다.

그렇게 해서 이룬 것이 “한강의 기적”이었고 올림픽, 월드컵, 엑스포 등 국민의 자부심을 일깨운 세계적 이벤트를 한국에 유치했다. 생소한 외국에 나가서 우리 국민들이 만나는 한국 기업들의 대형 광고판은 불안감을 씻어주는 안전판이었으며 변방의 작은 나라가 이만큼 해 냈다는 자부심이기도 했다. 성장과정에서 일부 기업인들의 일탈로 반기업 정서가 일긴 했지만 기업의 성장과 나라의 발전을 동일시 한 한국 기업들의 생각과 행동은 국민들의 사랑을 받는 데 모자람이 없었다. 

그런데 전쟁으로 세계의 공급망이 와해되고 북한이 핵으로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라는 한국기업 발전의 본질적 플랫폼을 위협하고 있다. 이 위기가 한국 기업들을 경제안보동맹의 최일선으로 파견 시켰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다. 이것은 한국 재계에 창업이래 내려 온 기업문화이자 유전자였기 때문이다.

경제 개발의 초창기에 이들은 힘을 합쳐 이 나라 저 나라를 찾아 다니며 돈을 구하러 다녔고 공동으로 시장을 개척했다. 중동에서 그랬고 동남아에서 그랬다. 정치적으로 어려움에 처한 정부를 구해 준 것은 대통령과 동행하면서 현지에 투자 보따리를 풀어 놓은 대기업들의 활약 덕분이었다. 사상 유례가 없던 코로나 위기 속에서 백신을 구해 온 것도, 마스크를 남을 정도로 만들어 낸 것도 기업들이었다. 

이 기업들이 지난 정권의 4년 간 43조원이나 되는 해외 투자를 했다. 해외 직접 투자 건수는 1만 2,169건이나 됐다. 노태우(828건), 김영삼(2,645건), 김대중(3,607건), 노무현(9,409건), 이명박(9,499건), 박근혜(1만 172건) 정부와 비교했을 때, 문재인 정부에서 월등히 늘었다. 세금 부담에 강성노조, 정부규제가 기업들의 해외투자를 떠밀다시피 했다. 이들을 다시 국내에 되돌아오게 하는 것은 이제 정부와 사회의 몫이 됐다.

앞으로 5년 간 국내에 928조원을 투자하고 38만명의 채용을 발표한 것이 한국기업들이다. 미국에 다 가버리면 국내에 뭐가 남느냐는 의구심을 단칼에 해소한 공동체 정신의 발로라 아니할 수 없다. 기업의 이익이 우선일 것이나 길게 보아 힘을 합쳐 위기를 극복하고 경제안보동맹의 확실한 승자가 되자는 한국 재계의 다짐이기도 하다. 사업에서는 경쟁 했으되 국가적 대사에는 같이 발 벗고 나섰던 정주영과 조중훈의 사례처럼 동맹의 최전선에 투입 된 우리 기업들의 선전을 성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