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북로아군실전기(北路我軍實戰記)]-(37)

김종해 한중우의공원 관장.
김종해 한중우의공원 관장.

십리평에서 하룻밤을 묵은 북로군정서는 다시 남쪽으로 행군해 갔다. 장인을 거쳐 계곡을 벗어난 행군대열은 ‘와록구’(臥鹿沟)에 도착했다. 와록구는 현재 ‘와룡촌’(臥龍村)내의 ‘만리구’(萬里沟)다. 이때가 10월 10일경이다. 이곳에서 3일을 지체하며 동계피복과 군량미를 준비했다. 그랬을 것이다. 지금이야 허물어져가는 집이 도처에 보이는 한적하고 낡은 촌락이지만 과거의 와룡은 ‘화집구(華集沟)골’과 ‘봉밀하’(蜂蜜河)가 만나는 곳으로 큰 마을이었고 지금도 소학교가 존속하는 중심지이다. 인근의 들판을 보면 충분하지는 못하지만 몇 끼 분의 개인이 지닐 정도의 식량은 구하기 어렵지 않았을 터이고 인근을 훑으며 겨울 복장도 준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부족하기 한정이 없었고, 부실하기 그지없었을 것이 확실하다.

이 와록구를 지나면 ‘충신장’(忠信場, 토산자(土山子)라고도 하며 현재 묘령과 화룡시내의 사이에 있으며 북로군정서는 토산자의 남쪽 즉, 화룡시가지 쪽으로 이동했다.)이 있으나 그곳은 노출이 너무 심했다. 그리고 중국군이나 이미 북만주로 전개를 시작한 일본군의 첩자가 도처에 깔려 있었다. 부대정비를 위한 장소로 충신장은 아니었다. 그리고 더욱이 그곳은 우리 동포들의 집거지도 아니었다. 동포들이 있었지만 중국인과 혼거지역이었다. 해서 청산리 일대로 진입하기 전 그나마 부대를 정비하기에는 가장 양호한 지역이 와록구였던 것이다. 필자가 답사를 하면서 느낀 점도 그러했다. 아무리 우리 동포들이 모여 사는 곳이 많다고 해도 넓은 땅에 계곡 구석구석에 자리를 잡고 있는 마을을 찾는 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을 터이고 또 한 흩어져있는 마을들도 도시의 흥청거림과는 무관한 한적한 곳이었기에 그 한계는 처음부터 지니고 있었다.

만리구(와록구)의 현재 모습.북로군정서는 이곳에서 3일을 지체했다.
만리구(와록구)의 현재 모습.북로군정서는 이곳에서 3일을 지체했다.

10월의 북만주는 초겨울 날씨다. 햇살 좋은 대낮에야 견딜 만하지만 해지고 밤바람이 스물 스물 몰려오는 시간부터는 손이 시리다. 산간에는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해서 추수가 지나면 칩거하거나 사냥에 나서는 것이 일상이었다. 이지역의 동포들은 대부분 함경도나 평안도 북쪽에서 건너 온 사람들이었다. 지금도 연변일대의 동포들은 원적이 함경도와 평안도가 대다수이다. 예초 농사보다 산채나 사냥에 능했던 피를 물려받은 이들이었다. 두만강 바람의 이쪽과 저쪽의 차이가 있었을 뿐, 여전히 긴 겨울과 찬바람을 맞고 사는 것은 매 한가지였다. 짐승 가죽을 벗겼을 것이고 산짐승이 지녔던 온기를 빼앗지 않으면 연명이 힘들었을 것이다. 겨울을 이기고 내년 봄에 다시 파종을 한다는 것은 살아남았다는 것의 연장선상에 놓인 일이지 단순히 계절과 시간의 흐름에 따르는 일상의 차원이 아니었다. 그것이 북만주의 삶이다.

그런 연유로 당시에 북로군정서가 준비한 겨울복장이라 봐야 한겨울 추위를 막기에는 부실하기 그지없는 수준이었을 것이 뻔하다. 목화솜이나 무명 몇 필을 구해 발싸개를 추가로 준비하고 동구니신이나 멱신정도에다가 가죽배자 정도나 준비했을까? 운이 좋은 이들은 누비 속옷 한 벌을 얻어 입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한지도 훌륭한 속옷이 되었다. 동포들은 유랑을 떠나 올 때부터 지녔던 서책의 제본 끈을 기꺼이 뜯어냈을 것이고, 급하게 만든 설피 등도 전했을 것이다. 그나마 북로군정서의 경우 통일된 개인 군복이나마 지급이 되었지만 다른 군소 독립군단체의 경우 이마저도 제각각이었다. 휴대한 무기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출발할 때 북로군정서의 복장은 무명 홑겹 옷에다가 카키색 물을 들여 입고 각반을 둘렀다. 일본군과 거의 외형상으로는 비슷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모직 같은 겨울 방한피복은 언감생심이었다. 있지도 않았고 구할 수도 없었다. 6ㆍ25 당시까지도 한국군이나 중공군이나 동절기에는 누비 옷 뿐이었다. 하물며 당시에는 말해 무엇 하겠는가?

물론, 십리평에 계속 주둔을 하고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면 목화솜을 넣은 누비 군복을 준비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보급창까지 있었던 십리평 캠프의 규모나 체코제 무기를 대량으로 구매할 수 있었던 자금 능력으로 볼 때 충분히 가능했을 것이다. 그리고 예초 치열한 전투를 전제로 부대를 이동시킨 것이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 주둔지를 구축하고 전투력을 보존하기 위한 이동이었기에 준비가 부실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동 중, 그것도 인근의 동포들로부터 십시일반 모아들일 수밖에 없는 -설사 구매를 했다고 해도 그 수량은 한정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겨울이 옴과 함께 대부분의 대원들은 추위와의 싸움도 시작되었다. 그 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화룡지역 특히, 북로군정서의 이동로 상에 있는 계곡지역 동포들은 눈과의 싸움이나 사냥에 능했으므로 겨우살이 준비가 제법 실했기에 그 정도라도 가능했을 터였다.

십리평엣거 와록구(만리구)를 향해 가다 만나는 중간 지점.사진은 장인강 소학교.
십리평엣거 와록구(만리구)를 향해 가다 만나는 중간 지점.사진은 장인강 소학교.

김좌진이 출발 시에 지참했던 군자금이 얼마인지 정확한 기록이 없다. 더군다나 추가적인 보급이나 군자금의 조달은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 다시 언급하겠지만 어랑촌 전투가 종료된 후에 철수 시 김좌진은 대원들을 분산 이동시켰다. 이때 개인적으로 약간의 여비를 지급한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소지하고 있거나 착용한 복장이나 비상식량 외에 별도로 추가 보급품을 지급한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북로군정서 대원들은 훗날 왕청의 ‘신선동’에서 재집결할 때 까지 각자가 피복이나 식량을 구매하거나, 구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의문점은 개인이 준비를 해야 했다면 부족한 군량이나 보급품을 약탈했을 가능성은 없었을까? 다행히 그런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김훈의 북로아군실전기나 이범석의 우둥불 등에도 허기와 추위에 시달리면서도 군율이 엄격해 보급품으로만 지탱한 모습이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다. 참으로 눈물겨운 모습이다.

그렇기에 독립군의 용전은 추위와 굶주림을 감내하면서 이룩한 피눈물의 기록임을 알아야 한다. 숱한 영웅담에는 잘 싸워 이긴 기록으로만 남아 있지만 행간에서 배제된 숨은 노고를 기억해야만 그 청춘들의 희생이 얼마나 고귀한 줄 알게 될 것이다. 지금의 가죽군화에 방한피복을 입고 있는 독립군이나, 털모자에 겨울외투를 입고 탄대를 비켜 맨 검은 수염의 건장한 독립군은 영화에서나 나오는 주인공의 모습이다. 적과 첩자들의 눈과 감시망을 피해 이동하는 독립군의 철수로에는 삶과 죽음의 경계선위를 걷는 아슬함이 추위와 허기를 상쇄할 정도로 엄중했기 때문에 감추어져 있었을 따름이었다.

한편으로 동포들의 정성도 헤아려 봐야 된다. 또 만들면 되겠지만 겨우살이에 필수품인 신발이나 저고리를 기꺼이 내 준 정성하며, 모피라는 모피는 모두 동원했을 그 정성 말이다. 적게는 몇 십 명, 많아도 기백 명에 불과한 마을 몇 곳을 다 동원해야 장정 600여명을 입히고 신길 수 있었을까? 김좌진의 싸움은 일본군을 만나기 이전에 벌써 부하들을 먹이고 입히는 것부터 치열하게 벌어졌던 셈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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