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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유희(Nothing Permanent, but···) 7
삶의 유희(Nothing Permanent, but···) 7
  • 사진작가 임창준
  • 승인 2023.06.06 08: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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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es of Wind(바람의 흔적)
그림1. Traces of Wind(바람의 흔적), 60x60cm, Pigment Print with mixed Media, Coati~
그림1. Traces of Wind(바람의 흔적), 60x60cm, Pigment Print with mixed Media, Coati~

김제 평야를 지나면서 시원한 바람 소리에 보리가 춤을 추는 보리밭을 멀리서 보면 바람과 함께 보리가 한바탕 놀고 있는 듯하다. 보리밭에 바람이 불고 지나가면, 바람 자리를 따라 이삭들이 서로 얼굴을 부딪히며 물결처럼 나부낀다. 이미 많이 익어 초록 초록하지 않은 노란 물결의 황금보리가 바람에 넘실대는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멋지고 힐링이 된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가며 심술궂은 봄바람 속에서 휘청거리다 못해 쓰러져 있는 수많은 보리 이삭들을 바라보면 무수히 많은 추억과 사연들이 떠오른다(그림1). 그 사연들 중에는 질병으로 고통받던 한하운의 시 ‘보리피리’, 언젠가 방문했던 장애우들의 공동체, 서로 다른 사상과 정치적 가치관으로 인해 친구, 친형제 사이에 벌어지는 비극을 그린 영화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등이 언뜻 떠오른다.

한센병에 걸려 직장에서 쫓겨난 후 사회적으로 기피와 멸시, 그리고 두려움의 대상이 된 한하운 시인은 평생 정착하지 못하고 방랑하며 비애와 한을 느끼며 슬픔의 시 ‘보리피리’를 썼다. 이 시에서 화자는 정리하면 '어린 시절에 대한 그리움, 즉 향수와 평범한 삶에 대한 소망 그리고 방랑하는 삶의 애환'을 그렸다.

천주교 영세를 받고 대부님이 추천해 주신 루카회에 가입 후 처음 의료봉사를 간 곳은 경기도 일죽 근처 어딘가의 장애우 공동체였다. 그런데 문을 열어준 이는 두 다리가 없이 양팔만 있는 분이었다. 그는 공동체의 총무라고 소개하며 우리를 집 안으로 안내하였다. 약 열 명 남짓하게 살고 있었는데, 그나마 이동이 가능한 이는 그 한 사람뿐이었다.

임창준 작가
임창준 작가

멀쩡하게 회사에 다니다가 주말에 자고 나니 온몸이 마비되어 움직이지 못했다는 이, 어느 날 갑자기 교통사고를 당해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 처음에는 가족들이 하루걸러 병원에 와서 간병을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지치기도 하고 각자의 생업에 종사해야 해서 점차 빈도가 낮아지게 되고, 부모는 끝까지 자식 곁에 있어 주고 싶지만 그분들도 지쳐가게 되고, 의료비는 끝없이 들어가다 보니 움직이지도 못하고 의식만 있는 환자들은 결국 가족들의 도움도 부담스러워 요양 시설을 찾게 되었다고 한다. 그들은 가족들이 찾아오는 것도 원치 않고 그저 그들 공동체가 자립할 수만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전부였다.     

그렇다. 장애는 남의 일이 아니라, 나도, 우리 누구도 하루아침에 당할 수 있는 일이라는 사실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아일랜드 독립과 내전을 다룬 영화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을 보면 625 한국동란을 겪은 우리의 슬픈 역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어제까지 운명 공동체였던 형제, 친구끼리도 서로 다른 사상이나 정치적 상황, 각자의 다른 믿음 때문에 서로 칼 들이대는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인 혼돈스런 현실이 아닌가. 이것은 대하소설 김성종 작가의 ‘여명의 눈동자’에서도 얽히고 설긴 우리 민족의 슬프고 한스런 삶의 유희를 느낄 수 있다. 

심술 궂은 봄바람에 휘청거리고 쓰러져 누워 있는 보리 이삭들을 어떻게 하면 바로 세울 수 있을까 생각해 본다.

글·사진= 이엔이치과 원장, 무늬와공간 갤러리 대표 임창준(bonebank@hite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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