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상의 항간세설] 진정한 자의식과 주체사상이란 무엇일까

 


세상이여 반갑다. 사람들이여 고맙다.”

 

신문기자 출신 평론가 김병익 씨의 회고록 글 뒤에 숨은 글 : 스스로를 위한 단상 (2004)’의 마지막 문구이다.

 

미국의 정치, 사회심리학자 월터 트루엣 앤더슨(Walter Truett Anderson)은 그의 저서현실은 전과 같지 않다(Reality Isn’t What It Used to Be, 1990)’에서 이렇게 주장한다.

 

오늘날 우리 대다수 인간은 신자라기보다 믿음의 소유자들이다. 쉽사리 또 자주 전향 개종한다. 종교적인 신앙에 있어서도 한 종교뿐 아니고 여러 종교를 통해 이것은 버리고 저것을 취하거나 또 다른 것을 제게 맞게 수정 응용한다. 과거에는 문화적인 양식과 형태를 갖춘다는 것이 신비 속에 싸여 있었으나 이제는 민주화, 개방되어 개개인마다 제각기 자신을 위해 자유롭게 저 자신의 신원(身元)과 현실을 만들어 내고, 현실이란 새 상품의 기업가들은 새 역사, 새 과학, 새 종교, 새 정치 등 새로운 제품을 창조, 개발하는데 마치 어린아이들이 물장난치듯 신바람이 난다.”

 

중국 고전을 TV로 강의해 장안에 숱한 화제와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동양 철학자 도울 김용옥씨는 2002불교의 본래 모습 - 다라이 라마를 만난 후란 제목으로 행한 강연을 통해 불교는 무신론이며 과학이라고 역설했다. 그러자 불교를 자기 식으로 고착화하고 과장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망치는 것이라며 팔리문화연구소장인 마성 스님이 김 씨의 저서 달라이 라마와 도올의 만남의 오류와 과장 등을 조목조목 지적한 글을 불교 인터넷 신문 붓다뉴스(buddhanews.com)에 올렸었다. 그 당시 영국에 사는 친구 김원곤 씨로부터 받은 편지 내용 일부를 공개한다.

 

도덕경 이야기를 하셨는데 생각나는 게 있어 몇 자 읊어볼까 합니다. 얼마 전에 도올을 울린 여자노자를 웃긴 도올이란 제목의 월간중앙 기사를 읽을 기회가 있었는데 참으로 통쾌한 글이었습니다. 이야기의 초점은 이름 없는 아주머니가 유명한 대학교수요 철학자인 도올을 상대로 시비를 거는 글이었습니다. 그 아주머니의 이름은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만 요즘 인기 절정의 도올이란 자가 TV에서 노자, 공자 강의를 하여 시끄러운데 그 내용이 아주 노자나 공자를 웃기는 것이랍니다. 도덕경 강의에는 노자가 없고 논어 강의에는 공자가 없으며 불경 강의에는 부처가 없다는 말로 도올을 정면으로 깔아뭉갰답니다.”

 

이 편지에서 친구는 자신의 소감도 피력했다. 단지 번역의 차이에서 오는 논쟁인 것을 어느 쪽이 맞는지는 2500년 전으로 돌아가 노자한테 물어볼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 아주머니의 주장은 철학 강의가 지식인들의 전유물이거나 엘리트화해서는 안 된다는 것으로 마치 하버드를 나와야만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든지 공자를 공짱구로 표현하고 노자를 책략가이고 쿵후의 달인이며 깡패와 칼잡이들의 우상이고 하는 결례는 물론 도덕경의 해석도 엉터리라는 것이었다. 공자의 태생을 천하다고 하면서 자기는 부유한 의사 집안에 태어나 온갖 부의 혜택을 다 받고 엘리트 코스만 두루 밟아 선택된 특권층이라 자랑하는 심사는 무엇인가. 이런 지식재벌, 지식귀족이 철학의 대중화를 공으로 내세우면서 성현들을 깔아뭉개는 작태가 왜 용인되어야 하는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 물론 재미있게 강의를 하는 것은 좋지만 제대로 지식 전달을 해야 한다는 것과 개그쇼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었다. 과학자는 아무리 형편없는 인간성의 소유자라고 할지라도 과학의 원리만 배우고 추구한다지만 철학은 철학자의 인격과 인품을 이해하지 않고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노자, 공자를 폄하해 가면서 그는 자기만이 알 수 있고 자기만이 강의할 수 있댜는 자만심에 사로잡힌 무늬만 지식인일 뿐이라는 것이었다.

 

, 그래서 예부터 재인(才人)은 덕()이 부족하고, 학무식(學無識)은 구제할 수 있어도 인무식(人無識 )은 구제할 길 없다 하는 것이리라.

 

우리 생각 좀 해보자. 세상에 예수, 석가모니, 공자, 노자 등 그 누구를 막론하고 다 하나뿐인 존재가 아니던가. 너와 나를 포함해서 세상에 태어난 사람 모두가 그렇지 않겠는가. 그 아무리 다른 사람한테서 배울 점, 본받을 점이 많다 해도 그 모두가 참고사항일 뿐이지, 그대로 전부 다 너나 나에게 꼭 들어맞을 수 없고 그대로 따르는 것이 결코 바람직하지도 않으리라. 너도나도 우리 모두가 하나같이 예수나 석가모니처럼 히피걸인이될 수도 되어서도 절대로 안 될 일이 아닌가.

 

좀 극단적으로 비유해서 사람의 말소리와 몸짓을 흉내 낸다고 앵무새나 원숭이가 사람이 될 수 없듯이 예수나 석가모니의 말씀을 입버릇처럼 되뇌고 그들의 행적을 뒤밟아 본들 너나 내가 예수나 석가모니가 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래서 부처를 만나거든 부처를 죽이고 가라하는 것이리라.

 

부모와 자식, 스승과 제자 사이라도 너는 너의 나는 나의 고행을 하고, 각자 각자의 십자가를 지며, 제각기 자신을 발견하고 자기만의 깨달음을 얻어 자아실현 자아완성을 도모해야 하지 않겠는가. 자아발견을 통해 이웃을 발견할 수 있고, 동시에 네가 나고 내가 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리라. 갓난아기가 눈을 뜨고 조금씩 걸음마 하며 배워가듯 나 없이 네가 있을 수 없고 너 없이 내가 있을 수 없음을 알게 되리라. 이것이 참으로 너는 너의 나는 나의 삶을 사는 참된 도리(道理)가 아니겠는가.

 

언젠가 한국의 결혼정보회사 비에나래가 전국의 20, 30대 미혼남녀를 대상으로 결혼 후 2세가 어떤 사람과 닮기를 바라는가에 관한 e-mail 인터넷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를 발표했다는데 설문 자체가 부적절하지 않았을까. 아무도 닮지 않은 전무후무의 유일무이한 개성과 특성을 지닌 2세가 가장 바람직할 테니까 말이다.

 

 

 

 


편집부 기자
작성 2020.02.26 11:11 수정 2020.02.26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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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