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코리아방송 = 김한정 기자] 인사동에 위치한 가나인사아트센터에서는 2021년 2월 24일~ 3월 2일까지 유승영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

유승영 개인전
유승영 개인전

“인간 또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바닥을 기반으로 한다. 그 그라운드 위에 모든 역사와 삶과 죽음의 페러다임이 엮겨 가고 있다. 존재의 근본이자 물질적 현실의 바탕. 바닥은 모든 시작과 끝이다. 수백만년 전에도 그곳이 있었고 수많은 생존의 흔적들을 내포하고 있는 근원이다”.

유승영 개인전
유승영 개인전

자동차를 몰고가다가.. 또는 도시의 거리를 걷다가 물끄러미 바닥을 바라본 적이 있는가. 아스팔트 바닥의 수없는 차선들..지시선들..그리고 그것들을 품고 있는 검고 묵묵한 그라운드..그래서 그 존재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해본적이 있는가..
나는 그 아스팔트 바닥을 바라본다..

유승영 개인전
유승영 개인전

바닥은 시간의 상징이다. 시간은 곧 존재함 자체이며, 태초와 미래를 하나의 연장선으로 이어주는 끈과 같은 것이다. 누구도 현재, 즉 이 순간을 정의 할 수 없다. 바닥의 형상은 그 시간의 끈을 한 모습으로 보여준다. 아스팔트위의 사소한 수많은 퍼포먼스의 증거를 한 장면으로 보여준다. 나는 그 시간의 공허함과 알 수 없는 진실의 찰라를 한 화면으로 보여 주고 사유하고 싶다.

삶은 어떤 상황도 정해져 있지 않다. 냉혹한 현실에서 갈 길을 잃고 있으며, 존재 이유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혼돈 하는 삶, 자아의 길을 잃은 삶.

유승영 개인전
유승영 개인전

그러나 절망만을 매만지고 좌절할 순 없다. 뭔가 알 순 없지만 희망을 갖고 싶은 인간의 욕망이 있다. 나는 내 그림에서 그 상징적 의미로 선과 화살표를 들고 있다. 아스팔트 위의 선들은 흔들리는 나에게 기준과 관점이 되어주고, 뭔가 제시하는 기준이 되는 듯하다. 화살표는 막연하지만 희망을 말해주는 이정표가 아닐까. 길 잃은 자아에게 갈 길을 명시해주는 기호의 상징이 아닐까.

기본적으로 삶은 고통스럽고 고독하며, 길을 헤매는 과정이다. 그래서 나의 바닥은 따뜻하고 정감 있는, 또는 자연미가 넘치는 바닥이 아니다. 즉 차가운 바닥이다.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 냉담한 현실은 존재하는 것들을 힘들게 한다. 그 현실을 이야기 하고 싶다. 현실은 무겁고도 냉정하다. 보는 이로부터 그 차가움에 대한 동병상련을 느끼고 싶고, 냉소적 위로를 구하고 싶다..

유승영 개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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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현을 통해 본 시각적 이중성

                                                                       화가  강 창 훈

우리가 본다는 것은 그것의 극히 일부분을 보는 것이고 그것을 통해 우리는 전체를 가늠하여 안다고 한다. 화가에게 본다고 하는 것은 일부를 통하여 전체를 인식하는 능력뿐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도 볼 수 있다는 확장성을 확보할 수 있다. 그리하여 전혀 다른 시각적 의미를 만들 수도 있다.

유승영 작가의 그림은 보이는 것과 본 것, 그리고 볼 수 있는 것 사이에서 객관적 시각으로 철저히 재현에 근거한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 그의 그림은 대상의 현상을 아주 철저히 관찰하고 파악하여 그것과 유사함을 나타내고자 하는 바탕에서 이루어진다.
재현이란 충실히 현상에 접근하려 하는 것이며 대상에 대한 어떠한 작위적 해석을 배제할 때 재현의 참된 의미가 있다. 원본과의 유사성에 종속되면서 원본과 닮는 것만이 재현의 선행조건이 될 것이다. 작가가 구현해낸 그림의 하이퍼적 사실성은 작가가 본다고 하는 것의 치밀성을 극대화한 것이고 그래서 더욱 인위적 행위가 배제된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작가가 재현에 얼마나 충실한지 보여주는 것이다.

유승영 개인전
유승영 개인전

보이는 것을 그리는 것은 일차적 행위이다. 대상의 사실성을 높이는 것으로 선행조건을 수행했다면 지금부터는 그가 가지고 있는 또 다른 이중성을 들여다보고자 한다. 그림의 소재는 도로에서 모티프를 얻는데, 도로에서 볼 수 있는 아스팔트 바닥과 도색된 선, 신호 표시들의 이미지를 끌어온다. 그것은 단순 도로에서 발견되는 것들이지만 작가의 특별한 직관적 시선으로 포착되어 화면에서 재생산의 공정을 거쳐 자기 완결성의 조형적 구성으로 구현된다. 도로에서는 차선이고 신호유도 표시였으나 화면에서의 그것들은 이제 지시적 기능을 하지 않는다. 화면으로 끌려온 도색된 선과 신호들은 주체적 이미지가 되고 기호가 되고 상징적 암시를 주는 조형적 표상이 된다. 화면에서 구현된 기호는 더 이상 질서화의 도구가 아니며 유사성을 매개로 존재하는 대상이 아니다. 이것은 단순 재현을 넘는 마음과 의식에 현전하는 자각으로써 작가의 의도에 의한 의미의 승화인 것이다.

유승영 개인전
유승영 개인전

원본에 기대어 닮음을 전재하고 있는 재현이란 원본에 도달할 수 없다. 하지만 원본으로부터 자유로운 모방이라면 문제는 달라진다. 도로의 기재들이 그림에서 신호체계의 역할이 아닌 상징적 암시가 되었다는 것은 더 이상 원본에 종속된 시뮬라크르의 역할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제 재현은 재현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려진 그림은 대상의 유사성으로 출발하여 재현적 모방을 거쳐 사유의 공간으로 들어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재현에서 사유로, 사유는 정신적 표상으로, 가시적 세계의 실체성을 넘어 비가시적 세계의 잠재성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은 도로에서 보인 대상을 잘 보아서 잘 그려낸 것뿐만 아니라 비재현적 사유를 통한 낯선 세계로의 확장을 의미한다.
 

유승영 개인전
유승영 개인전

그의 그림이 보여주는 이중성은 단연 재현적 표현이 비재현의 시각적 환영을 가져다준다는 것에 있다. 우리의 눈은 불안전하고, 보았다고 하는 것이 실질인지 허상인지에 대한 불확실성을 내포한다. 재현에 의한 아주 사실적 그림이 어떤 시각으로 보면 비재현의 색면추상으로 보이는 역설. 이것이 그림이 내포하고 있는 가장 큰 이중성이다. 재현된 대상은 대상 이미지의 실질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전혀 새로운 차원의 비구상적 비주얼로 확장되어 추상의 가능성을 열고 있다.
 

유승영 개인전
유승영 개인전

아스팔트와 도색된 페인트의 마티에르에서 무거운 물질감을 느낀다. 이것은 앵포르멜이 보여준 정신성의 투영과 물질적 흔적이 아니던가? 수많은 자동차의 질주와 또 어떤 많은 사건을 간직한 시간의 텍스츄어로서 기록이 아니던가? 본다는 것을 직접적 시각으로 받아들였다면 이후 표현된 그림은 사유의 과정을 통해 관조 되고 재생산되어 다른 차원으로 고양된 세계와 삶의 진동을 경험하게 한다. 미적 경험은 대상에 대한 감상자의 특별한 사유로부터 얻어질 수 있다. 그것은 관찰과 경험의 축적, 그리고 인지의 상태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도로는 보는 관점에 따라 기능적 역할뿐만이 아니라 그곳을 통하여 내면적 감정 상태와 정신적 작용을 투영하는 대상이 될 수도 있다. 도색된 선의 갈라짐을 통하여 고통이나 고독을 떠올렸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단순한 고통이나 고독으로만 작용하지 않는다. 비극적 인상은 심리적 작용에 의해 더 높은 선호를 원하고 나아가 이상적 치환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도로의 바닥은 시간의 축적을 의미할 수도 있다. 수많은 자동차의 질주는 순간들의 집적을 가져오고 순간은 모여서 시간이 되고 시간은 삶의 근본이 되지 않던가? 따라서 도로의 바닥에서 느꼈던 감정은 시공간을 통하여 우주적 이치에 닿아있다. 시간과 공간 속에서 근본을 생각할 수 있다는 존재론적 사실이 우연히 보게 된 도로바닥의 직관적 만남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빅뱅의 시작 점처럼 어디에서든 어느 순간에든 일어날 수 있는 시공간의 원리가 미적 체험을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진리란 어떤 사물과의 마주침을 의미하는데 이 마주침은 우리에게 사유하도록 강요하고 참된 것을 찾도록 강요한다”는 들뢰즈의 말처럼 도로의 도색 면에서 고통이나 절망을 보았다면 역으로 그곳에서 희망도 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유승영 개인전
유승영 개인전

칸트(Kant)는 미학적 가치 체험을 정신의 수용적 태도를 서술하면서 정신의 활동은 능동적인 활동이 아니라 사변적 활동이라고 하였다. 그는 그것은 “이해를 초월한 마음에 드는 것”이라 정의하고 대상을 자기 것으로 가지려고 욕심을 부리거나 애쓰지 않고 대상의 직관에 잠겨 있는 것이라 하였다. 작가가 대상을 통하여 드러낸 심리적 암시와 기호들은 즉물적 시각으로 포착되어 사변적 활동의 단계를 거쳤다고 하더라도 대상에서 느끼는 직관적 감정을 통하여 미적 체험을 가능케 하는 경과로써 존재에 대한 깊은 성찰로 볼 것이다.

도로의 여러 지시선 에서 인생의 나아갈 바와 방향을 생각할 수도 있으며 바닥의 의미를 넓혀서 인생의 근본진리를 생각할 수도 있다. 생사고락의 인생사가 바닥을 통하여 투영될 수도 있는 것이다. 미적 경험의 가치가 실제 경험과 연관되지 않아도 된다. 그것은 대상을 통한 감정 상태가 꼭 인식된 지식이나 관념을 통하여 드러나는 것이 아니고 새로운 차원의 감정과 느낌을 통한 경험이기 때문이다. 갈라진 도색 면의 크랙에서 누구는 고통을 누구는 죽음을 볼 수도 있다. 이렇듯 그림을 고통이나 죽음이란 것들조차도 관찰이 가능한 경험명제의 집합으로 바꾸어놓는다. 따라서 그림은 보는 이로 하여금 관찰이 불가능한 영역까지도 물리적 현상으로 보여주면서 환원주의적 시각에서 미적 완결성에 접근하고 있다.
시간은 모든 것을 파멸한다. 유승영은 이 파멸의 순간을 재현을 통한 시각적 이중성으로 박제하고 우리를 로고스의 세계에서 카오스의 세계로 이끌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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